▲내가 쓴 글에 대한 합평도 다 다르다. 부정적 평을 들을 땐 등이 선득거리지만, 깨지지 않으려면 이 수업에 올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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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녀 덕분에 나는 두 번의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그녀가 참여하고 소개하는 수업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 두 번 수업은 내 인생에 지진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독서토론을 겸한 글쓰기 수업이었다.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가 아니라 책을 읽고 토론하고, 각자 써 온 글에 대해 합평을 하는 수업이었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기도 했고, 독서 토론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사실 좀 부담이 되었다. 뭔가 있어 보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내 본전이 드러날까 봐 두려웠다.
첫 수업 시간 때, 그 수업이 아니면 아마 평생 보지 않았을 책들이 과제로 주어졌다. <여공문학> <일하지 않을 권리> <노년은 아름다워> <아픈 몸을 살다> 등 처음 읽어보는 난해한 책들. 더 난해한 건 그 책을 읽으면서 아무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무심함과 무관심이 낳은 무지였다.
또한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TV나 신문에서만 접하던 사람들을 만났다. 동성을 좋아하는 친구,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고 옥살이를 하고 나온 친구 등등.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생생하게 그들이 사회의 편견으로 인해 겪는 불편함들, 고뇌, 선한 소시민으로서의 평범한 일상을 들으며 부끄러웠다. 뉴스나 기사에서 다뤄지는 짤막한 정보만으로 함부로 판단했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엔 그녀가 흘린(?) 정보로 시사 칼럼 쓰는 수업도 듣고 있다. 얄팍한 시사 상식에, 한 번도 시사 칼럼이란 걸 써 본 적이 없어서 4주째 매일 장벽을 넘고 있는 기분이다. 장벽 넘는 과정에 좌절은 필수다.
글을 쓰다가 맥락을 놓치고 헤매는 일도 다반사고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어서 자괴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매주 '이번 주는 빠질까' 하는 유혹과 '뻔뻔하게 넘어서자'는 의지 사이에서 자아분열을 하곤 한다.
그래도 그 수업 시간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이다. 한 가지 이슈에 대해 써오는 글이 모두 다르고, 관점도 다르다. 한 이슈는 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경험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해석되고 통찰된다.
내가 쓴 글에 대한 합평도 다 다르다. 부정적 평을 들을 땐 등이 선득거리지만, 깨지지 않으려면 이 수업에 올 필요가 없었다. 내가 일부러 '좌절'이라는 지뢰가 많은 자리로 나를 던지기로 결정했으니 그 결정에 책임을 다하는 수밖에.
그리고 이제는 안다. 매번 자존심 상하고 좌절하고 소심해지는 이 고개를 넘으면 한 발자국 정도는 나아가 있을 거라는 걸. 나보다 어리지만 이미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훨씬 밀도 있게 사는 친구의 뒤를 쫓으며 얻은 용기다.
30대를 돌아보면 아쉬운 건, 내가 이런 시간을 적극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언가 일을 벌이려면 많이 알아야 할 것 같고, 그러려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라고 쓰고 게으름이라고 읽는다)이 되었다. 굳이 그런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아서 대충 내가 익숙한 시간에만 머물렀다. 사람도 그렇다. 굳이 낯설고 나와 다른 사람들 속에 가지 않았다. 많이 만날 필요는 없다 해도 다양하게 만나지 않은 것은 후회스럽다.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