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강연 중인 은유 작가
박초롱
- 작가를 직업으로 삼는 것도, 그냥 여성으로 사는 것도 힘든 세상입니다. 하물며 여성 작가로 살아가는 게 힘들진 않으셨나요?
"힘든 점이요? 너무 많아서 다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일하는 주체로 인정받기보다는 쉽게 '대상화'되곤 하잖아요. 성적인 대상화요. 젊으면 젊은 대로 젊음으로 소비되고요. 나이가 있어도 여성은 보조적인 역할로 인식이 되죠. 저도 마찬가지죠. 남성 작가들에게는 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제게는 편하게 하실 때도 많고요.
한 번은 한 기관에 강의를 하러 갔는데, 내부 관계자분이 제게 인사를 하면서 '작가님 만나서 잘 됐다. 건물 앞에 붙여놓게 시구 좀 뽑아줘라. 작가님 책은 안 읽었지만 작가님이 시를 좋아한다더라' 하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키듯이요.
타인의 노동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지만, '만약 내가 남성 작가였으면 부탁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게 말하면 제가 친근감 있어 보이는 거겠지만, 여성이어서 만만해 보이는 것도 있었던 거겠죠. 제가 그때 있었던 일을 페이스북에 썼더니 한 남성 번역가분이 '자기는 강연 다녀도 이런 일 없었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남자는 당할 확률이 낮다'고 말씀드렸어요(웃음)."
신영복 선생 책 읽다가 깜짝 놀란 이유
은유 작가는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에 남성 청중이 손을 들면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무례한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경우를 더러 봤기 때문이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한 책의 제목처럼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대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예전에는 무례한 질문에 대답해 놓고도 내가 상대방을 무안하게 한 건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어요. 혹은 더 친절하게 말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했죠. 저는 그런 걸 '착한 여자 귀신이 붙었다'고 하는데, 여자는 늘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웃는 얼굴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내면화가 되었던 것 같아요.
친절한 건 좋지만 선의가 늘 선의로만 통용되지 않고 여성 비하적인 상황으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태도를 다르게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죠. 내 의견을 개진하는 게 중요하고, 모든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도 않아요. 어떤 질문은 그게 왜 궁금한 건지 되물어보는 것 자체로 답변이 되기도 해요. 제가 잘 대처해야 여성 후배들이 존중받을 수 있겠다 싶을 때 책임감을 느껴요."
여성 후배들을 위해 단호하게 의견을 개진하겠다고 말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작가는 여자라서 큰 불편을 느낀 적이 없었다(은유 작가는 결혼 후 1녀 1남을 두었다 - 기자말). 부모님이 딱히 보수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여성에게 너무 많은 짐이 주어진다고 느꼈다. 억울한 일이 너무 많았다.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존재하기 어려웠다. 작가가 변한 것처럼, 사회도 변했다고 느꼈을지 궁금했다.
"글쓰기 수업하고 강연 다니면서 만나보면 여자들은 정말 많이 변했어요. 남성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여성의 인식 변화를 실감할 관계가 주변에 없는 분들이 많아요. 직장이나 가정에서 늘 맺던 관계만 맺으면 실감 못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여성이 자기 언어를 만들어서 말하고 실천하는 것 외에 방법이 특별히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내 안의 가부장, 착한 여자 귀신을 떨쳐버리고, 늘 타인을 배려하고 희생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우선이 되는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바꾸어내야지요. 내가 타인을 어떻게 바꿀 수는 없잖아요. 자식도 못 바꾸는 걸요. 내가 바뀌어 나가면 사회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내가 아는 걸 실천하고 내가 느낀 걸 말하고 타인과 대화를 통해서 확산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 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활동이 있을까요?
"제가 벌써 50세 가까운 위치에 있더라고요. 나도 누군가가 끌어줘서 많은 지지와 격려 속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방법은 고민 중입니다.
또 하나는 여성의 책을, 이왕이면 젊은 여성의 책을 많이 읽고 홍보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 공부를 하면서 내가 왜 이렇게 여성으로서 많은 억압을 느끼고, 스스로 내 안의 가부장을 모시고 살았을까 생각해보니, 남성의 책을 너무 많이 읽었더라고요. 좋아하는 작가들이 다 남성이에요. 시인도 이성복, 기형도, 김수영... 다 남자죠. 최승자 시인도 좋아하지만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죠. 남성의 생각, 가치관, 언어를 내면화한 거라고 생각하니까 무섭더라고요.
얼마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30주년이어서 책을 다시 읽다 보니 걸리는 게 많은 거예요. 좋은 엄마란 그 책에 나온 것처럼 아들의 옥바라지를 헌신적으로 하는 인내심 강한 엄마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다시 보니까, 아들을 뒷바라지하는 어머니의 인생은 어땠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앞으로는 여성의 책을, 이왕이면 젊은 작가의 책을 읽어야겠다 싶었죠. 글쓰기 수업에서도 토론 교재로 여성 저자의 책을 중심으로 고르고, 남성도 젠더 감수성이 있는 저자의 책을 선정해요."
좋은 직업보다 더 중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