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접공 시절을 회상하는 노회찬 의원
노회찬 의원실
노회찬의 사회 출발은 용접공으로 시작되었다.
대학 시절에 접했던 다양한 독서와 시대적 상황이 그를 노동계로 이끈 것이다. 한국 사회는 4월 혁명과 10ㆍ26사태를 겪고도 변화가 없고 기층노동자들의 생존은 어렵기만 했다.
일제강점기 이래의 기득권층이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자들과 맥을 같이 하면서 거대한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비록 군부정권을 막지는 못했으나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노동자들이 크게 각성하고, 사회의식에 눈뜨면서 변혁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다.
광주항쟁을 전후하여 많은 대학생이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현장 취업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위장 취업'이라 하여 좌경으로 몰고 공안 사건으로 형사처벌을 일삼았다. 청년들은 굽히지 않았고 1982년 한 해에만 전국의 '위장취업자'가 1만 명에 이른다는 말이 나돌았다. 실제로 5공시대 각종 시위에는 노동자들의 참여가 많았고, 이들의 배후에는 위장취업자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노회찬은 우유부단한 성격이 아니다. 작심하면 결단하고 실행한다. 하여 노동자의 길에 나섰다. 전기용접 기능사 자격이 있고 신체가 건강해 보여 금방 취업이 가능했다. 선량한 노동 청년들과 어울리며 열심히 일했다. 대학졸업생이란 것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1980년대 초 노동계는 블랙리스트에 명단이 올라 취업이 봉쇄된 해고노동자들이 1983년 말부터 종교ㆍ학생운동과 연계하여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을 시작하면서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듬해 1월 6일 한국노동자복지회의 결성은 노동운동의 큰 전기로 작용했다. 창립과 함께 채택한 〈노동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선언〉에서 "유신독재의 어두운 시대에 민주노동조합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다 권력의 잔인한 탄압에 의해 희생된 당사자로서 비조직적이고 고립분산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운동의 주체성ㆍ통일성ㆍ연대성을 드높일 것"을 천명했다.
한국노동자복지회는 이후 민청련 등과 함께 블랙리스트 철폐운동ㆍ노동법개정 투쟁 등을 전개했으며, 80년대 노동운동의 이정표가 되었다. 노회찬은 이같은 노동계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고된 노동자의 길을 걷는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노동자 생활은 3년 동안 계속되고, 20대 후반의 청춘을 보내었다. 월급을 받으면 박노해의 시집을 사서 이웃들에게 나눠 주었다. 14살 때인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듣고 어린 나이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