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3월 8일의 국회의원 선거법 날치기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6월 민주항쟁이 있은 지 다음 해인 1988년 민정당은 소선거구제 부활을 골자로 하는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때 장제원 의원의 아버지 장성만 의원(당시 국회부의장)이 의장으로서 의사봉을 두드리는 역할을 했다.
동아일보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라고 평가되는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4.19혁명과는 결이 달랐다. 전두환 군사정권을 몰아내는 방식이 아닌 6.29선언 수용이라는 타협적 방식으로 정리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16년 만에 치러진 직선제에 입각한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 관리의 주체가 전두환 군사정권이 되면서 군부재자 투표를 비롯한 선거 부정을 원천 차단하지 못하고 노태우의 당선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게 재집권에 성공한 민정당은 이듬해 총선을 앞두고 유신잔재로 지탄받아온 중선거구제를 극복할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1973년의 2.27 총선에서부터 사라졌다가 부활하게 되는 소선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 역시 여야간 합의는커녕 1988년 3월 8일 새벽 2시께 민정당의 기습적인 날치기로 본회의를 통과하고 만다.
그런데 살펴볼 게 있다. 이때 민정당이 처음부터 소선거구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민정당은 다자구도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자당의 노태우 후보가 역대 최소인 36.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재미를 본 후, 이어진 1988년 총선에서도 안정의석(과반의석)을 확보할 방안으로 시·군·구를 기본단위로 한 선거구당 1~4인을 선출하는 복합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한다.
아직도 여촌야도(與村野都) 분위기가 강한 상황에서 농촌 지역은 지역구별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하고, 대도시에서는 2~4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선거를 치르는 게 민정당 입장에서는 안정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안이었던 것이다.
반면, 지역구당 2명을 선출하는 기존의 중선거구제는 유신잔재라며 소선거구제로의 개편을 강하게 주장해오던 김영삼의 민주당과 김대중의 평민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뒤 셈법이 좀 복잡해져 있었다.
전통 야당이 민주당과 평민당으로 갈라져 있고, 대선에서 새로이 등장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까지 감안한다면 1여다야 구도 속에서 소선거구제가 오히려 여당 민정당의 과반의석을 보장해주는 필패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 여기에 개별 의원들의 이해타산까지 얽히면서 선거법 개정 논의는 더욱 더 미궁에 빠져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정당과 제1야당인 민주당 사이에 소선거구제 도입 30곳을 포함한 선거구당 1~3인 선출제에 대한 잠정 합의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 정무회의에서 거부됐다. 여기에 민주당과 평민당 사이의 단일안 도출도 어렵게 되자 민정당은 호남과 서울 등 취약지역은 선거구를 줄이고 여당이 강한 강원·경북 지역은 교묘하게 늘리는 내용을 포함한 소선거구제를 '1분 날치기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88년 당시 민정당이 날치기라는 방식을 동원하면서까지 소선거구제를 밀어붙인 이유는 유신잔재 철폐라는 대중적 명분에도 부합하고, 1여다야 구도 속에 안정의석 확보라는 실리도 챙길 수 있는 안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4.26 총선의 결과는 민정당의 기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총 299석 중 민정당이 125석(지역구 87, 비례대표 38, 득표율 34.0%), 평민당이 70석(지역구 54, 비례대표 16석, 득표율 19.3%), 민주당이 59석(지역구 46, 비례대표 13, 득표율 23.8%), 신민주공화당이 35석(지역구 27, 비례대표 8, 득표율 15.8%)을 얻어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기타 한겨레민주당 1석).
역설적이게도 1988년 3월 8일 국회에서 마이크도 사용하지 않고, 법률안 제안설명도 유인물로 대체한 뒤 선거법 개정안을 상정해 의사봉을 두드린 장성만 국회부의장은 이 선거에서 낙선했다.
6월 민주항쟁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노태우의 당선으로 귀결된 대선 결과는 곧바로 이어진 총선에서 되레 노태우 정권에 대한 견제심리 강화로 표출됐다. 여기에 지역주의가 결합하면서 여소야대 국회를 탄생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