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의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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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자력갱생과 김정은의 자력갱생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김정은은 미국 때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자력갱생을 외치는 데 비해, 김일성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적대 진영이 아닌 공산 진영, 그것도 소련의 압박으로 인한 고립 때문에 자력갱생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서는 1953년 3월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그 해 9월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쵸프)가 공산당 제1서기가 됐다. 이 정권교체는 북한 경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 때만 해도 북한은 '중공업 우선 정책을 추진하되, 그에 필요한 자본을 소련 원조를 통해 조달한다'는 경제전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북한 내부의 반(反)김일성 세력을 지지하면서 그 전략을 흔들어댔다. 중공업 우선주의가 북한의 민생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명분이었다. 흐루쇼프는 이 명분을 내세워 대북 원조를 대폭 삭감했다. 북한 경제전략의 토대를 약화시킨 것이다.
흐루쇼프는 공산권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에 가입할 것을 종용하는 방법으로도 김일성을 압박했다. 북한 경제를 코메콘의 틀 속으로 끌어들여,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김일성은 말려들지 않았다. 박후건 경남대 교수의 <북한 경제의 재구성>은 이렇게 설명한다.
"흐루쇼프는 실용주의적 개혁을 단행하고 사회주의권 경제통합체인 코메콘을 확대·강화했다. 바로 이 시기에 북한은 코메콘 가입을 거부하고 자력갱생의 원칙에 기초하여 민족경제를 건설한다는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경제정책의 기본 노선으로 설정했다. '중공업 우선 발전, 경공업·농업 동시 발전'이라는 중공업 최우선 정책을 추진하며, 내부의 자원을 극대화해 경제개발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스탈린 때는 '중공업 우선+소련 원조'란 공식이 북한 경제를 지탱했다. 흐루쇼프의 등장으로 '소련 원조' 부분이 약해지자, 김일성은 이 공식을 '중공업 우선+내부 자원 총동원'으로 수정했다. 이것이 자력갱생의 기본 원칙이다.
그런 김일성에 맞서, 흐루쇼프는 정권을 위협하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흐루쇼프는 소련식 집단지도체제를 북한에도 정착시키려 했다. 김일성을 '유일 지도자'가 아니라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격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죽은 스탈린'을 격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산 김일성'까지 격하하려 했던 것이다. 흐루쇼프는 반김일성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고, 이들이 김일성을 합법적 방법으로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의 <북한의 역사> 1권은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소련 대사 이바노프는 조선노동당 상무위원이며 연안파 최고 실력자인 노(老)혁명가 최창익에게 당 중앙위원들의 결의로 김일성을 합법적으로 당 위원장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최가 당을 장악해 김일성은 내각 수상에만 전념케 하자고 제의했다."
국가기구보다 높은 노동당에서 김일성을 끌어내린 뒤 그를 실무적 의미의 행정부 수반으로 격하시키자고 제의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반김일성 세력이 준비한 무대가 1956년 8월 2일로 예정됐던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다. 지난 10일 김정은이 자력갱생을 강조했던 그 무대를 활용해 1956년 당시의 반김일성 세력이 합법적 쿠데타를 준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