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리도류코쿠본
김선흥 소장본
고등학교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책들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라고 더 낮추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의 예외없이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강리도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자 중화주의적인 세계상'이 되고 맙니다.
조지형 교수의 비분강개가 8년 동안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내용은 대체로 아래와 대동소이합니다.
"다른 나라의 지리정보를 수집하여 만든 세계 지도이다. 이 지도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세계 지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세계 지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의 지도를 추가하여 편집·제작한 것이다."
"강리도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지도로 지도의 중심부에 중국이 그려져 있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으며, 조선을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여 자주적 국토관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유럽, 아프리카 등을 축소 왜곡하여 표현하였으며, 지리상의 발견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이므로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지역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강리도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에 불과하다면 나라 밖에서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강리도를 그렇게 규정하고 마는 것은 마치 김연아에 대해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터라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한국 선수'라고 소개하고 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뿐더러 이토록 짧은 문단 속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강리도에 중화주의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타당할까요? 당시의 중화문명은 현대의 서구문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게 선진문명이었습니다. 지금 한중일이 서구화의 길을 걷고 있듯이 당시의 동아시아는 중화 문명을 배우려 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중화주의'라는 단어는 결코 그런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중화주의를 논하는 학자나 교사는 당연히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애써 그렇게 부정적으로 가르키고 있는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강리도는 중국을 가운데에 크게 그리면서도 조선을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그림으로써 중화주의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강리도는 또한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초광역의 지리영역을 그린 세계지도입니다. 그 의의와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중국에 거의 동일한 세계상을 그린 지도가 있으나 제작 시기가 불분명합니다).
국내와 국외의 평가가 다른 이유
예전에 미국의 레이크 노먼(Lake Norman) 고등학교에서 강리도를 어떻게 학습하는지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의 강리도 학습과 좋은 대비가 되므로 이참에 좀 보충해 보겠습니다.
학교 사이트에 제시된 강리도 소개 글을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강리도: 한국인의 새로운 세계상
개요 : 미대륙이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기 이전에 가장 주목할 만한 세계지도가 한국에서 출현한다. 이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일반적으로 강리도라 불리는 이 지도는 조선왕조 시대(1310~1910) 초기인 1402년에 제작됐다. 조선인들이 만든 이 걸작은 당시로써는 세계의 전부였던 아프로-유라시아(Afro-Eurasia)를 그리고 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이 지도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높은 수준의 정확성에 아연실색하게(astounded) 될 것이다. 일본은 실제와 달리 너무 멀리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유럽 부분도 많이 미흡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럽이 지도에 그려져 있다.
알고 보니, 이건 이 학교 교사의 독자적인 교재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판을 거듭하고 있는 역사서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The Human Record(인류의 기록)>(2009)에 담긴 내용입니다. 제 1권은 1500년까지의 세계사적 사료를 싣고 있는데 강리도가 비중 있게 다루어 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고등학생들의 세계사 학습 탐구용 교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문화재에 대해 미국 고등학생들은 그 가치를 제대로 배우고 있는데 반해 우리 학생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책임은 학생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국내의 어떤 한국학 총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강리도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등 구대륙 전체를 포함하고 있지만, 지리적 중화관으로 인해 서쪽 지역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배우성, <조선과 중화> 380쪽(2014, 돌베개 한국학 총서 17)
하지만 정작 서양학자들은 유럽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강리도의 유럽에는 약 100개의 지명이 실려 있는데 아직 이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지중해는 분명히 인식할 수 있고(clearly recognizable), 이베리아반도, 이태리반도 및 아드리아해도 마찬가지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지명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확실한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다." (myoldmaps.com/236-kandingo.pdf)
총 2415쪽에 달하는 서양의 거대한 백과사전이 있습니다. 비서구권의 과학, 기술, 문화의 역사를 편찬한 대작인데 강리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리도는 얼른 보면 왜곡의 집합체 같다. 중국과 인도는 나뉘지 않은 채로 중앙에 압도적인 형세로 자리 잡고 있는 반면 유럽과 아프리카는 서쪽 가에 매달려 있다. 한국은 동쪽 가에 매달려 있는데 마치 유럽과 아프리카를 합친 것만큼 커 보인다. (...) 그러나 강리도는 동으로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 나아가 지중해와 흑해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와 홍해를 싣고 있는 동아시아 최초의 지도로서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지도의 역사에 세기적 업적(epochal achievement)을 이룬 것이다." - <Encyclopaedia of the History of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 in Non-Western Cultures>(2008), 1313쪽
한편, 국내의 지리학 사전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의 가장 큰 결점은 중화적 세계관에 의하여 중국과 우리나라를 너무 크게 그려 넣음으로써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과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 점이다." - <지리학 사전>(1993, 우성출판사)
우리 주류 학계와 교육 현장에서 강리도가 꼼짝없이 중화주의 프레임에 갇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리도의 진면목과 진정한 가치는 드러날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이 학문적으로 그리고 교육적으로 타당한 것인가에 있겠습니다.
두 지도의 결정적 차이
서양 지리학을 수용한 19세기 최한기의 지도 혹은 현재의 세계지도와 1402년의 강리도를 비교해 그 우열을 논하는 것은 한 마디로 난센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책과 교육 사이트가 보입니다.
강리도 이후 16~18세기에 나온 우리 지도들은 그야말로 중화주의로 회귀해 버렸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강리도를 그런 지도들과 비교해 볼 때 비로소 강리도의 변별적 특징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1666년 김수홍 지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