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 현판도서관 리모델링 후 '중앙도서관' 현판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지금도 학술정보원 출입구 위에 자리하고 있다. '중앙도서관'이라고 새겨진 나무 현판 아래에는 도서관의 원래 이름인 '우남기념도서관' 현판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백창민
이승만 시대 문자 해득률은 급격히 높아지고, 학교와 학생은 크게 늘었다. 1945년 22%에 불과했던 문자 해득률은 1959년 78%로 3.5배 가까이 상승했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초등학생 수는 2.6배, 중학생 수는 11배, 고등학생 수는 3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대학은 19개 대학 7819명에서 63개 대학 9만7819명으로 12배 이상 늘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안 되던 시절 이승만 정부는 1948년부터 1960년 사이 총예산 중 연평균 10% 정도를 교육 분야에 썼다. 학교와 학생 수가 크게 늘었지만 교사와 교육 자재, 교실은 부족해서 교육 여건은 좋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작했다. 의무교육으로 성장한 세대가 1960년대와 1970년 '한강의 기적'을 이끈 세대가 된다. 1950년대를 거치며 대량으로 탄생한 한글 세대는 거대한 인적 자본을 형성해서 1960년대 이후 노동집약 산업과 중화학공업 노동력의 핵심이 됐다.
정부 지원과 국민의 뜨거운 교육열이 결합한 결과지만, 이런 업적 때문에 이승만을 '교육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박명림 교수는 "이승만의 실정(失政)과 업적이 4.19를 불렀다"라고 평가했다. 이승만 시대 교육 투자를 통해 성장한 민주주의 의식이 역설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학교의 양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공공도서관은 눈에 띄게 성장하지 않았다.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전국적으로 24개의 도서관이 늘어나 한 해 평균 2.18개의 도서관이 늘어났을 뿐이다.
대학 도서관의 사정은 어땠을까. 해방 이후 전문학교의 대학 승격이 추진되고 사립대학 신설이 크게 늘었다. 대다수 사립대학은 등록금에 의존해 재정난을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학생 정원을 늘리고 등록금을 인상했다. 상당수가 농업에 종사하던 이 시절 소와 밭을 팔아 자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한다는 뜻으로 '우골탑'이라는 표현이 회자됐다.
사립대학이 난립하고 대학의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정부는 1955년 대학설치기준령을 공포했다. 건물, 땅, 체육장, 교직원, 도서 5가지 항목이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대학을 통폐합하거나 학생 정원을 감축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립대학의 집단 반발로 대학설치기준령은 무력화되지만 이 때문인지 1950년대 후반 중앙대를 비롯한 여러 사립대학이 잇달아 도서관을 짓기 시작한다.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오천석은 <대학교육의 위기>라는 글에서 도서와 실험실 설비 면에서 중·고등학교만도 못한 대학이 흔하고 대학의 심장부인 도서관을 제대로 갖춘 대학이 드물다고 지적했다. 한국전쟁 시기가 끼어 있지만 이승만 집권 시기는 '도서관의 암흑기'라 평할 만하다.
미국 유학을 통해 도서관의 기능과 효과를 잘 알았을 '이승만 박사'가 이렇다 할 도서관 정책을 펴지 않은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건이 어려워서 도서관을 지을 겨를이 없었을까.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도서관을 운영한 그가 무소불위의 권좌에 오른 후에는 왜 도서관을 제대로 짓거나 운영하지 않았을까. 비슷한 시기 북한에서 김일성이 도서관을 적극적으로 늘려 갔음을 고려할 때 두 지도자의 도서관 정책은 대조적이다.
이승만과 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