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돌한 반역행위>(경향신문, 1948. 8. 28)당시 언론은 이신태 등의 돌출행동을 <당돌한 반역행위>, <반민족자의 발악> 등으로 묘사하며 규탄하였다.
경향신문
최근 나경원 의원(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동작구을)의 "해방 이후 반민특위로 국론이 분열됐다"는 돌출 발언이 연일 화제다. 각계의 규탄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급기야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도 나섰다.
상도동에 살고 계신 101살의 독립운동가 임우철 선생이 직접 나서 "대표적 친일파 이완용이 3월 1일 전국민적 독립항쟁을 무산시키고자 3월 항쟁을 두고 '몰지각한 행동'이고 '반일 행동'은 국론분열이라는 망언을 한 것처럼, 오늘날에는 나경원이라는 몰지각한 정치인이 이완용이 환생한 듯한 막말을 하고 있다"며 의원직 사퇴를 촉구했다.
오늘의 목적지 동작문화복지센터 마당의 맞은 편 상도동 171번지에 살고 있던 이신태(28)라는 한 청년의 1948년 당시 돌출행동이 떠올랐다. 상도동 청년 이신태(28)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그 해 8월 27일 동료 차양보(27)와 함께 국회의사당 방청석에서 기습시위를 벌여 파문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이신태가 시위를 벌인 그날, 국회에서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축조·심의하고 있었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단은 당시 민중의 공통된 숙원 사업이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반민족 처단법은 시기상조다!", "반민족 처단법안을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삐라'를 살포하고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이신태는 사건이 있기 3일 전 남산에서 대혁청년단의 박성술로부터 모종의 지령을 받고, 그에게서 받은 삐라 중 일부를 구두 속에 숨긴 채 국회 방청석까지 들어갔다고 했다. 그가 속한 대혁청년단은 이북 지역에 기반한 우익 청년단체로 1947년부터는 서울에 지부를 설치하여 이남에서도 활동을 시작한 조직이었다. 이신태와 차양보 역시 이북 출신이었다.
이들은 삐라를 통해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는 빨갱이"라면서 스스로 '애국청년'으로 불렀다. 친일파 처단 문제를 교묘하게 이념대립의 문제로 몰고 간 점도 그렇고, 자신이 마치 애국자인 양 행세한 점도 최근의 나경원 의원의 경우와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하지만 당시 <경향신문>은 이들의 돌출행동을 "당돌한 반역행위"라고 표현했고, 심지어 <동아일보>조차도 "반민족자의 발악"이라고 개탄했다.
반민특위가 국론 분열했다고? 당연히 '틀렸다'
이후 이신태와 차양보는 수도경찰청에 넘겨지지만, 처벌은커녕 연행된 지 불과 열흘 만인 9월 6일에 석방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된다. 이들의 배후에 엄청난 비호세력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조병옥과 함께 이승만의 오른팔과 왼팔 역할을 하면서 친일파를 비호한 대표적인 인사였다.
해방 직후 38선 이남을 담당한 미군정은 이북지역의 소군정과 달리 친일파 처단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에게 친일파는 "일본에 대해서 늘 그랬듯이 미국에게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사람들"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총독부 관리, 친일 경찰, 일본군 장교 출신의 친일파들을 그대로 중용했다. 심지어 독립운동가 출신 정이형을 중심으로 하여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를 만들었을 때도 미군정은 이를 공포하는 것마저 거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제헌국회는 이신태 등 친일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한 제헌헌법 제101조에 근거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법령 제2호로 통과시켰다. 이어 이 법에 근거하여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구성하고 1948년 10월부터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친일파와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지속적인 방해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급기야 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과 극회프락치 (조작)사건까지 터뜨린 끝에 공갈과 협박에 성공하여 반민특위 활동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반민특위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결국 김상덕을 비롯한 반민특위 위원들은 전원 사퇴로 항의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 구성된 반민특위(위원장 이인)는 사건을 대충 마무리한 채 1949년 10월에 해체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