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항은 철문을 탁본하는 순간 문을 여닫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지금여기에
지난 2월 9일 남영역의 작은 카페에 어색한 표정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이 70대의 어르신부터 20대의 젊은이들, 일본 국적의 참가자... 뭔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모임 가운데에 그렇게 젊지도 그렇게 나이가 많지도 않은 중년 여성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되신 아버지(정종희)를 대신해 그 자리에 참석한 정숙항이다. 활발하고 씩씩한 그녀의 목소리는 늘 모임에서 활력이 되었다.
"늘 혼자 있으면 기가 죽어요. '간첩'이란 말만 들으면 기가 팍 죽어버리는 거죠. 고개도 못 들겠고... 근데 희한하죠. 오늘처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뭉치면 편해져요.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무서운 것도 없고. 이렇게 선생님들 손 잡고 남영동 들어가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간첩' 꼬리표는 그렇게 물리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간첩'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가 되었다. 내가 잊으려 하면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간첩가족의 기억, 그때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면 점점 더 다가오는 그 기억. 그러나 아버지와 같은 처지의 피해자 어르신들 손을 잡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들어가니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살이를 한 '간첩'이다. 그와 함께 연행되어 재판 받았던 친척들 중 한 명은 사형을 선고 받고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국전쟁 때 월북했던 그의 조카 한 명이 남파되어 내려온 적이 있는데 그때 신고를 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조카가 보성에 내려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갔는데 그 후로 아버지가 라디오를 통해 북한과 연락을 주고받고 그때마다 암호를 풀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전간첩이 된 것이죠. 그게 말이 돼요?"
토벌대 총탄에 두 눈 잃은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