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인용된 논문의 일부.
한국동남아학회
한국과 필리핀에 대한 처우가 이렇게 판이한 것은, 미국이 한국인은 싫어하고 필리핀인은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이가 생기게 된 결정적 원인이 있다. 유석춘·김인수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필리핀의 정치 지도자들이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던 것과 달리, 필리핀 국민들이 인식하는 안보 현실에서 미군의 역할은 미미한 것이었다. (중략) 필리핀 국민들은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 대해 특별한 고마움을 느낄 까닭이 없었다. 미군은 다만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자,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불평등한 조항이 포함된 미국과의 군사기지협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 필리핀 국민들 대부분이 공감하게 되었다."
필리핀 정치인들은 미군에 대해 우호적이었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그에 아랑곳없이 미군의 본질을 똑바로 직시했다. 미군이 주둔하는 목적이 필리핀 보호보다는 미국 국익 증진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들의 눈에는 미군이 필리핀 땅을 무상으로 사용하는 것이 불합리한 일로 비쳐졌다. 그래서 그들은 행동에 나섰다. 이것이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행동을 촉구하고 나아가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이 한국과 필리핀을 차별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필리핀 국민들은 '우리는 필리핀을 지켜주려고 이곳에 왔다'는 미국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미국도 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필리핀 국민들을 기만하고 미군 주둔을 빌미로 금전적 이익까지 얻으려 했다가는 자칫 쫓겨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미국 측이 그에 맞게 행동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필리핀 국민들이 싫어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미국은 필리핀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다. 서태평양 방어 정책을 통해 미 본토를 지키자면 필리핀과의 동맹이 절실했다. 그래서 기지 사용료도 내고 군사원조도 하는 방법으로 필리핀 국민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킨다는 사실을 필리핀에서만큼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뒤 1986년 필리핀 시민혁명 뒤에 증폭된 반미운동의 결과로 미군은 1992년 필리핀에서 철수했다가, 1999년 방문군 협정을 통해 최장 14일간 합동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필리핀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2014년에 방위협약 확대협정을 통해 미군을 재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으며 지금은 재주둔을 준비 중이다.
10억 달러의 방위비 분담을 한국 정부에 요구한 뒤인 지난 1월 17일,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조선일보>에 특별기고문을 실었다. '한미 동맹, 방위비 분담 고비도 넘어야'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해리스 대사는 "21세기 경제문화 강국인 한국은 세계 11위 경제대국이자 6위 무역강국이다"라며 한국의 경제력을 높이 평가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동등한 파트너로서 이 위대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훨씬 더 큰 분담을 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는 주한미군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도 포함된다. 한국을 지킨다는 우리의 공약은 굳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