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을 당시의 김현장씨(위). 아래쪽은 문부식씨. 1982년 8월 2일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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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김현장씨는 1989년 1월 21일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의장 이부영)에 합류해 국제협력국장 직을 맡았다. 하지만 해외 운동권과 연락을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나 출소 9개월 만인 198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때 만난 검사가 바로 황교안 전 총리다.
"황교안, 깨끗한 검사란 느낌이 들었다"
지난 23일 <중앙일보>가 게재한 기사 '황교안 정치멘토는 자신이 사형 외쳤던 반미좌파 김현장'에 따르면, 김현장씨는 강찬호 <중앙일보> 논설위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황교안을 처음 만난 건 내가 1989년 전민련 국제협력위원장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출소 6개월 만에 재구속됐을 때였다. 남산 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에서 20일 넘게 고문받다가 검찰로 넘겨졌는데, 담당 검사가 황교안이었다.
분위기가 안기부 요원들과는 확 달랐다. 존댓말을 쓰며 사람으로 대해줬다. 내게 사형을 구형할 때도 부끄러워하며 낯을 붉히는 모습을 보였다. 깨끗한 검사란 느낌이 들었다."
국제협력'위원장'이라는 표현과 '6개월 만에 재구속'이라는 표현은 기억의 오류로 보인다. 황교안 검사가 사형을 구형했다는 회고도 당시 언론보도와는 다르다. 일례로 1990년 2월 8일 자 <한겨레신문>은 "서울지검 공안2부 황교안 검사는 7일 한통련·유럽민협 등 해외 단체와 범민족대회 관련 자료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된 전민련 국제협력국장 김현장씨(40)에게 국가보안법의 국가기밀누설·회합통신·금품수수죄 등을 적용,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했다"라고 보도했다.
김현장씨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형기를 다 채우지 않았다. 1993년 3월 석방됐다. 미문화원 사건으로 6년 살고 나온 뒤 얼마 안 있어 재수감돼 4년을 더 살았으니, 운동권 경력을 감안해도 인생역정이 꽤 파란만장했다.
성장 환경 역시 그랬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당시 휘발유통을 들고 건물에 뛰어든 김은숙씨의 저서 <불타는 미국>에 따르면, 김현장씨 집안은 학교 설립에 7만 평을 희사할 정도로 강진군 제일의 유지 가문이었다고 한다. 김현장씨의 언급을 기초로 서술됐을 이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출생한 1950년부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원인이 돼 자신의 출생 이후로는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그래서 스물세살 때 입대하기 전까지 그는 한편으로는 학업을 하고, 한편으로는 생계 전선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연탄 장사, 술집 직원 겸 색소폰 연주자, 건축 노동자, 탄광 노동자 생활도 했다고 한다. 배가 고파 강도 행위를 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적도 있다고 한다.
'박흥숙 사건' 알린 르포작가에서 부미방 배후로
그 뒤 그는 르포작가로 변신해 사회문제 고발에 나섰다. 조선대학교 금속공학과 재학 중에 병행한 일이다. 27세 때 그가 터트린 특종은 광주 무등산에서 강제철거에 맞서다가 철거반원들을 죽인 박흥숙 사건(1977)이다. 집에 불을 지르며 행패를 부리는 철거반원들과 싸우다가 21세 된 박흥숙씨가 저지른 사건이다.
박흥숙씨는 1980년 12월 24일 사형집행을 당했지만,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동정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 작가가 바로 김현장씨다. 그는 월간 <대화> 1977년 8월 호에 박흥숙씨에 대한 기사를 써, 기존 언론과 정반대 시각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렸다. 이때 관심을 보이며 구명운동에 나선 인물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다.
김현장씨는 5.18 당시에는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란 유인물을 작성, 문정현 신부 등의 도움으로 1만 장을 배포했다. 이로 인해 수배를 당하고 강원도 원주에 피신했다. 이때 벌어진 사건이 바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