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심란함의 이면에는 집을 짓는 동안 우리가 창조하며 누린 기쁨과 단련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과 더불어 우리는 이 집에서 살아갈 것이다
황우섭
다 버려두고 씻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서촌 한옥에서 한 달여 가까이 보고 살았던 박스를,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저 박스를 다 뒤집어서 짐들을 꺼내놓기로 했다.
박스 안에서 구겨지고 포개진 짐들은 풀어놓으니 남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끝도 없이 나오는 책들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행여나 이라도 나갈까봐 몇 번을 싸고 또 싼 그릇들을 꺼내려니 풀어도 풀어도 포장지가 계속 나왔다.
짐을 꺼낸 박스는 또 다른 일거리였다. 차곡차곡 쌓는다고 쌓아둔 박스들은, 그러나 몇 장만 쌓으면 허물어지기 일쑤였고, 그 박스 치닥거리를 하느라고 신경이 곤두섰다.
새 집에 들어왔다는 감격, 오래 기다린 이 순간에 대한 기쁨 대신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걱정과 염려, 눈앞에 가득한 짐들을 정리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간에 맞춰 새로 짜맞춘 가구들은 아직 생경했고, 거기에 익숙한 살림을 집어넣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려니 뭔가 어색하고 정신이 없었다. 일단 책은 책꽂이로, 옷은 옷장으로, 그릇은 찬장으로 각자 있어야 할 곳들에 뭉텅이째 집어넣었다.
내 집임에도 온통 낯선 것들 천지였다. 가스레인지 대신 새로 들인 전기레인지에서는 불을 켜면 연기가 피어올라 무서워서 손도 못 대고, 써오던 통돌이 세탁기 대신 부엌에 짜맞춰 넣은 드럼 세탁기는 이게 대체 돌아가는 건지 뭔지 알 수 없었다. 김치냉장고와 냉장고를 따로 쓰던 것을 칸칸마다 냉동, 냉장으로 전환이 가능한 김치냉장고 하나로 대신하기로 했는데, 모드 전환이 제대로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창문이 안 달린 탓에 일단 임시 비닐로 가려놓은 창 밖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비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보안경고음이 수시로 울려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전기 콘센트는 온통 새 것이라 빡빡해서 전원 연결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용을 써야 했고, 방방 스위치는 어떤 게 대청 조명이고, 어떤 게 부엌 조명인지, 어떤 게 마당 조명이고 어떤 게 현관 조명인지 알 수 없어 불 한 번 켜려면 몇 번을 껐다켰다를 반복해야 했다.
대청에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단차는 빨리빨리 짐을 옮겨야 하는 순간에 매우 불편했다. 여닫이가 아닌 옛날식 찬장처럼 미닫이문으로 달아놓은 부엌 수납장 역시 손에 익지 않아 그릇을 정리하는 데 꽤 까다로웠다.
익숙하고 평이한 것을 피하고 조금은 독특하게 만들려고 애썼던 것들은 손에 익기까지 시간을 요구했다. 10년 넘게 써온 전기 주전자는 서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물을 넣지 않고 전원 버튼을 올리는 바람에 졸지에 사망했다. 새로 산 전기레인지 사용법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물을 끓일 방법이 없어 커피 한 잔 만들어 마실 엄두도 내지 못했다.
피곤과 심란함이 교차하던 그날밤. 어느 순간 점점 짜증의 수위가 높아지려는 찰나. 나와 남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철퍼덕 대청에 주저앉았다. 생각해 보니 다시 못 올 순간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 그 기나긴 여정이 이제 끝이 났고, 이 집에서의 첫날이 아닌가. 우리는 두 손을 맞잡고 웃었다. 저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설핏 눈물이 비치기도 했었나.
처음 이 집을 만난 이래 수많은 고비와 뜻하지 않은 상황에 널을 뛰며 여기까지 왔다. 손에 쥔 게 넉넉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꿈꾸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작지 않았다. 전전긍긍했던 숱한 밤, 어찌할 바를 몰라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해야 했던 무수한 낮을 건너 지금에 이르렀다. '돈이 정말 많았나 보다'라는 주위의 농담에 웃으면서도 너무 큰 욕심을 부린 건 아닌지 돌아볼 때가 많았다.
살던 집의 부동산 거래와 은행의 대출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엑셀로 정리한 예산표를 보고 또 보며 얼마나 속이 까맣게 탔는지, 예정보다 지체되는 현장의 속도에 뭐라고 말도 못하고 속을 끓이던 순간은 얼마나 아득했는지 모른다.
그뿐만은 아니다. 건축가와 공간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를 의논하고 나오는 길에 먹었던 체부동집 잔치국수는 얼마나 맛있었는지, 현장을 오가며 장차 내가 살 동네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다녀보는 즐거움은 또 얼마나 각별했는지, 수많은 책과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며 만나는 이미지를 앞다퉈 보여주며 취향의 동일함을 확인할 때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 순간을 함께 지나왔다.
집 한 채를 짓는 것은 우리만의 우주를 만드는 일과도 같다. 이 우주를 창조하는 내내 힘들게 하고 즐겁게 하는 수많은 변수와 고비, 순간 앞에서 늘 한마음, 한 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