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무위당사람들
장일순이 교육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즈음, 이승만 정권의 횡포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54년 5월 20일 3대 민의원선거가 금권ㆍ폭력선거로 자유당이 승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면서 종신집권의 길을 텄다.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이 야당의원들에게 북한 인민위원회 명의의 남북협상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배달시키고, 이를 빌미삼아 용공으로 때려잡는 등의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장일순이 경영하는 대성학원에도 경찰과 반공청년단원 등이 수시로 나타나 엉뚱한 트집을 잡고 금품을 갈취하는 등 한국사회는 독재와 부패의 수렁에서 희망을 찾기 어려웠다. 장일순은 여러날 동안 고심을 거듭하였다. 이승만의 반민주적 전횡을 바로잡고 한국사회의 중층적인 모순구조를 타파하는 길은 정치혁신 외에 달리 길을 찾기 어렵다고 보았다.
1955년 9월 18일, 이승만에 반대하는 민주당이 창당되었으나 장일순은 통일문제나 경제분야의 정강정책에서 자유당과 크게 차이점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진보당 등 혁신정당의 정책에서 시대정신과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전부터 친면이 있던 윤길중과 어울리며 죽산 조봉암이 추진하는 진보당에 관심을 보였다. 진보당은 결당식에서 △책임있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정강을 채택하고, 특히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맞서 평화통일론과 그 구체적 방안으로써 유엔감시하의 총선거안을 제시하였다. 장일순은 이런 부분에 공감이 갔다.
1958년 5월 2일로 제4대 민의원 총선거가 공고되었다.
이에 앞서 이승만 정부는 정치적 라이벌로 등장한 조봉암을 제거하고자 이 해 1월 13일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 7명을 간첩혐의로 구속하는 등 이른바 진보당사건을 날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