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선생님.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
장일순은 부농 출신인데도 비판적 지식인의 길을 걷고 진보성향이었다. 그리고 청소년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학 복학을 포기한 장일순은 청소년 교육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졸업 때까지 자신이 내는 등록금이면 60명이 넘는 가난한 아이들을 무상으로 가르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머리 좋은 아들이 복학을 포기하고,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고 있는 혼란기에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겠다고 나선다면 말리지 않을 부모는 흔치 않을 터이다. 더욱이 원주는 전화가 극심했고 그만큼 희생자가 많은 지역이었다.
장일순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일제의 우민화 정책과 전쟁을 겪느라 배움의 기회를 잃고, 특히 원주에는 피난민이 몰려오면서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만큼 많았다. 부모의 동의를 얻어 25살이던 그는 1953년 국민학교(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중등과정을 교육하는 성육(聖育)고등공민학교 교사로 들어갔다. 월급도 받지 않는 자원봉사였다.
1년여 후 학교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교장이 공립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아 떠나게 되었다. 교사들이 "우리가 학교를 민주적으로 운영해 보자"며 돈을 모아 학교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리더십과 포용력이 뛰어났던 장일순을 교장으로 추대한다. 26살 때이다. 그는 교장이 되었지만 교장실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학생들에게 영어와 수학 과목을 가르쳤다. 교실 안에서는 엄한 스승이었지만 교실 밖에서는 한없이 자애로운 큰형님, 큰오빠 같았다.
(주석 4)
장일순은 1954년 도산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했던 민족학교 대성학원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학교 이름을 대성학교로 고치고, 학생들의 인성교육에 전념하면서 교훈을 '참되자'로 정한다. 이때 내건 '참되자'는 평생 그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이 되었다. 참된 가치관을 갖고 참되게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1인1기(一人一技)의 교육을 통해 사회에 적응토록 가르쳤다. 향후 5년 동안 이사장으로서 학교의 발전에 헌신한다.
성육학교가 전수학교(專修學校)이다 보니 아이들이 정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정규 고등학교를 설립하자는 결심을 하신거죠. 교육부로부터 어렵게 설립 인가를 받고 교실이 완성될 때까지 명륜동 원주향교의 건물을 빌려서 열댓 명 학생으로 받아 학급을 꾸렸습니다. 학교는 향교 뒤편 야산을 깎아 지었습니다.
미군부대에서 구한 아스팔트루핑으로 지붕을 씌운 건물을 지어 3학급 150명 학생들을 향교와 신축 교사에 나누어 가르쳤습니다.
학교 운동장은 원주에 진주해 있는 1군사령부군대 장비를 지원받아 만들었습니다. 일순 형님이 이사장을 맡았고, 학교를 같이 설립한 친구 장윤 씨가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주석 5)
주석
1> 이창언, <좁쌀 한 알 장일순선생의 삶과 사상>, <진보정치> 64호, 222쪽, 메이데이, 2015.
2> 이창언, 앞과 같음.
3> 장화순, 앞의 글.
4> 김영주, 앞의 증언.
5> 김홍렬, 앞의 증언.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