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에 발생한 자동차 전복 사고.
국가기록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4일에는 부산 영도교 인근 해상에서 술 마신 선장이 자기 선박으로 다른 선박의 측면 중앙을 들이받는 사고가 있었다. 다행히도 긴급 출동한 수상경찰이 20분 만에 침몰 선박의 승무원 12명을 구조해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배에 실려 있던 거액의 해산물은 건지지 못했다. 1951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는 "침몰선에는 어획한 5백여 상자의 어류가 있었"다면서 "이번 피해는 약 1억 5천여만 원에 달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문맥상, 이 금액은 추정치다. 전쟁 중이라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만한 가치의 해산물이 바닷속으로 도로 돌아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음주운전 사고는 있었다.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한 경각심도 존재했다. 1929년에 발생했던 유명한 음주운전 사고의 피해자인 서석란(17)의 진술에서 그런 정서를 느낄 수 있다.
3·1운동 10년 뒤인 1929년 11월 4일, 주점 직원인 서석란은 동료 김소련(17)과 함께 경주군청 직원 이귀돌(22) 일행의 불국사 나들이에 동행했다. 이들이 타고 간 차는 일종의 렌터카였다. 지금과 다른 게 있다면, 회사에서 운전사까지 파견했다는 점이다.
그해 11월 6일자 <동아일보>에 언급된 운전사의 이름은 강본무문(岡本武文·22)이다. 일본이 창씨개명 시행을 위해 조선민사령을 개정한 때가 1939년이므로, 강본무문은 그 이전에 자발적으로 일본 성명을 선택한 한국인이거나 아니면 한국에 이민 온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정황상 후자에 더 가깝다. 일본인이었다면, 오카모토 다케후미(혹은 다케부미·다케야스)로 불렸을 것이다.
이귀돌 일행은 서석란 일행과 합류하기 전부터 이미 취해 있었다. 이들은 운전사와 함께 불국사에 가서도 계속 마셔댔다. 이때부터 서석란은 가슴을 졸였다. 운전사까지 술을 입에 댔던 것이다. 그는 분위기에 휩쓸려 과음까지 했다. 겁이 난 서석란은 술 한 되를 몰래 숨겼다. 하지만 오래 감추지 못했다. 이귀돌 일행과 운전사가 그 술도 찾아내 마셔버렸기 때문이다.
운전사가 술을 마신 뒤부터 안전을 염려하기 시작한 서석란의 모습에서, 음주운전을 위험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정서가 드러난다. 자동차 이용자의 범위가 적어서 경각심이 널리 확산되지 않아서 그렇지, 자동차를 이용하거나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주운전을 다들 경계하고 있었다.
서석란의 진술에 따르면, 불국사를 떠나려고 시동을 건 직후부터 차가 이상했다. 차가 똑바로 전진하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 쏠리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서석란은 "대단히 불안"했다고 한다. 결국 차는 전복됐고 이귀돌은 즉사했다. 나머지 네 남자 중 셋은 앞니가 전부 빠지거나 경상을 당했고, 서석란 일행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중상을 입었다.
사고 직후에 운전사는 손님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술 취한 손님들이 운전을 방해하고 핸들에 달려드는 바람에 차가 전복됐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운전사도 과음했다'는 서석란의 진술을 크게 보도했다. 기사 제목도 '운전수도 음주, 처음부터 염려'다. 부제목은 '손님이 운전 방해한 일 없소'다. 더 이상의 보도를 찾지 못해, 이 사건의 처리 결과는 확인하지 못했다.
순박하던 신하를 잃은 이성계의 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