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갈라지고 쪼개질지언정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황우섭
차 없이 어떻게 사나 싶더니, 필요가 없더라
그러나 낭만은 낭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이사 후 가장 먼저 맞닥뜨린 건 바로 주차난이었다. 이 집은 좁긴 했지만 대문 바로 앞에 차를 세울 공간이 있긴 했다. 그런데 이 공간에 사유지가 일부 포함되어 있었고, 여기에 차를 세우려면 자동차 한쪽 바퀴가 그 땅에 걸쳐질 수밖에 없었다.
구구한 사정이야 생략하고, 결국 우리는 몸은 서울에 있으나 차는 살던 아파트 단지에 당분간 세워둘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서울 주택가의 주차 문제는 훨씬 심각했다. 아파트 단지에 차를 세워놓고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앞으로 차 없이 어찌 지내나, 걱정이 컸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 막상 살아보니 차가 없어도 거의 불편함이 없었다. 광화문 한복판 대중교통의 편리함은 경이로웠다. 그동안은 집 가까이에는 편의점밖에 없어서 장을 보려면 대형마트에 차를 끌고 다녀야 했다. 신도시 안의 다른 동네에 가는 것도 차 없이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서울 시내 어디든 지하철과 버스 한두 번만 갈아타면 쉽게 갈 수 있었고, 대형마트까지는 아니어도 편의점보다는 큰 슈퍼마켓도 가까이에 있어 일상적인 장보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없으면 큰일 날 것 같던 자동차가 오히려 짐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웃들과의 관계 역시 매우 생경했다. 이사 오기 전 살던 아파트에서 7~8년을 살았지만, 이웃이라고 할 만한 관계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골목길을 오가다보니 자주 만나는 얼굴이 있게 마련이고, 주차 문제로 도움을 받은 어르신과는 며칠 지나지 않아 친근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도 되었다.
인사를 주고 받지는 않아도, 우리가 어느 집에 살고 있는지 동네분들이 대충 다 아는 눈치였다. 나는 상대방을 모르는데 상대방은 내가 어디 사는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골목길을 품고 사는 '이웃'과의 일상을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집 근처 사는 청년은 오토바이를 타고 시도때도 없이 들고 났다. 처음에는 한밤중, 새벽 가리지 않고 들리는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거슬렸는데, 그의 들고나는 것에도 일종의 규칙이란 게 있고, 그 규칙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이후에는 차차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몇 시쯤 되었나보다, 가늠할 정도로 익숙해지기도 했다.
이 집 벽과 저 집 담이 거의 붙어 있는 탓에 밥상에 숟가락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오늘 저녁에는 어떤 메뉴가 밥상에 올라가는지 냄새로 짐작할 수 있게도 되었다. 서울 한복판으로 이사를 왔는데, 오히려 어릴 적 살던 마을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서울 대표 명소 중 한 곳이다보니 집 근처 슈퍼마켓에 가려고 슬리퍼 끌고 머리 질끈 묶고 나가다가 멋지게 차려 입은 커플이 사진 찍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란 일도 있다. 어느 주말 점심에는 하루 걸러 한 번씩은 밥 먹으러 가는 식당 앞에 기나긴 줄이 늘어선 걸 보며 여기가 어디라는 걸 실감하기도 했다.
주민도 아니고, 여행자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경계에서 살아본 서촌은, 골목을 나누며 사는 일상은 여러모로 매우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