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고 학생들의 맹휴 소식을 알리는 경향신문(1959. 3. 5)서울공고 학생 2,200명은 교장 사생활에 대한 해명, 진학반을 편성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전원 등교거부를 했다.
김학규
서울공고생들은 4.19혁명 당일에는 학교 측의 저지로 주도적 참여는 하지 못하지만, 20일부터는 육군운동장(용산우체국 뒤편)에서 열린 합동위령제에 학교 측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막힌 교문을 부수고 나가 참여하는 등 시위에 함께한다. 이 과정에서 김길웅을 비롯한 3명의 학생이 중상을 입기도 한다.
언론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1965년에는 휴교령도 내려지고 개강 이틀 만에 다시 휴교령이 연장되는 것으로 보아 서울공고생들은 한일회담반대운동 시위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967년 6.8 부정선거 반대운동 때도 서울공고생들은 "300여 명이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데모에 돌입"했다고 한다. 유신시절이던 1975년에는 동문들이 70주년행사를 준비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공고를 다닌 일본인 동문들과 교류를 시작하는데, 재학생들은 "일본인을 우리의 동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라면서 혈서를 쓰고 플래카드를 거는 등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이때 학생회장이 교사들에게 끌려가자 학생들이 흥분해 담장을 넘어 가두시위까지 벌이기도 한다.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전환시대의 논리> 등으로 1970, 1980년대 젊은이들에게 감명을 줬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 자신도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던 민족의 지성 리영희(1929~2010)도 공립 서울공업학교 출신(1944년 졸)이라는 점을 기억해둘만하다.
본관 뒤편으로 가면 동문회에서 운영하는 '서울공고 역사관'이 있다. 그런데 역사관에 기껏 박찬익 선생만 소개돼 있을 뿐 서울공고생들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전시돼 있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
동문회에서 '서울공고 역사관'을 대폭 개편하는 결단을 내려준다면 재학생은 물론 동작구 지역 사회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스무살 한정실 |
서울공고 출신 선배 중에 상도동에 살던 한정실은 가미카제 특공대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군 함정에 뛰어들다 죽는다.
함경북도 경성이 고향이 고향인 한정실은 1940년 경성공업학교에 진학한 이후 줄곧 수석을 다툴 정도로 수재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집을 학교 인근 상도동으로 옮겨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아들을 뒷받침했다.
그런 한정실이 2년 후 돌연 육군 소년비행병 학교(사이타마현 구마가야)에 입학한다. 한정실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비행사를 꿈궜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조선인은 19명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시작이 친일 문학인 서정주가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유명한 헌시를 바친 인재웅이었고, 그 마지막이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한정실이었다.
사망 당시 한정실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겨우 스물(1926년 생)이었다. 한정실은 식민지 청년으로 어린 나이에 전쟁에 동원되어 전사했다는 점에서 피해자였지만, 가마카제 특공대로 미군 함정에 몸체공격을 감행 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가해자였다.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한정실은 식민지 청년의 비극적 운명을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낭만과 전설의 동작구', 동작FM) |
(* 이번 기사로 대방길 탐방을 마치고, 다음 회부터는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노량진길'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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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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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고가 대한민국 독립에 끼친 영향, 정말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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