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고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전하는 언론 기사(1989. 3. 7, 한겨레신문)성남고 학생들은 교사협의회 활동을 이유로 2명의 교사가 성남중학교로 강제 전보되자 이에 항의하여 수업거부와 농성을 벌였고, 끝내 승리하였다.
한겨레신문
성남고에는 "교육민주화의 의지를 다짐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성남교육 교사협의회 일동' 이름의 표석이 설치돼 있다.
부끄러운 성남고 설립자들, 원윤수와 김석원
그런데 이러한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성남고도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성남고의 설립자는 원윤수(1887~1940)와 김석원(1893~1978)이다. 원윤수는 텅스텐 광산에서 큰돈을 번 광산재벌로 일본군을 위해 쌀 3000석과 군용기 '경기호' 제작에 1000원을 헌납하기도 한 대표적인 친일기업인이다.
김석원은 일본육사를 나와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에 부역해 '전쟁영웅'으로 미화되면서 '일본군국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전쟁에서 돌아와서는 전국을 돌며 군사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성남고보를 만든 이유를 동작구청은 <동작구지>(1994)를 통해 "광복의 원동력이 될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민족학교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자각"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설립 당시 발행된 <매일신보>를 보면 성남의 교장은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아베 요시오(安倍良夫) 일본군 소장이었고, "이 학교는 육군사관학교의 준비교가 되도록 하는 특성을 가지고 '데뷰'하게 되었다"라고 소개돼 있다.
실제로 성남 출신의 학생들은 일본 육사나 군사학교에 다수 진학하는데, 1943년 한 해만 해도 일본육사(예과)에 3명, 육군유년학교에 3명, 항공학교에 1명, 경리학교에 1명 등 총 8명이 지원한 실정이었다(<매일신보>, 1943. 6. 30). 1944년에 부임한 성남의 2대 교장도 일본인 우지에(氏江富雄)이었다.
지역의 유지와 지방자치단체와 야합하면 역사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동작구청은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러한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개정판 발간 계획조차 세우지 않고 있다.
성남고의 아픈 역사는 해방 73주년이 되는 지금에도 성남고 교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성남고 교가는 설립자인 친일파 원윤수와 김석원을 '원석두님'의 '크신 공덕'을 칭송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먼동이 터오니 온누리 환하도다'라는 가사가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을 칭송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의혹까지 나온 상황이다.
▲성남고 교가비먼동이 트니이 온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강산에 원석두님 나셔서
배움의 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 없네
성남 성남 무궁탄탄 할지어다
김학규
이렇듯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가사를 담은 '교가비'가 교정에 '당당히' 서 있는 것도 참으로 어색하다(관련 기사 :
'일본 천황 찬양 교가, 한국 맞아?'). 성남고에는 2002년까지 설립자 김석원의 흉상이 설치돼 있었으며, 김석원의 무덤은 지금도 교정 안 뒤편에 있다.
성남고가 들어서 있는 자리는 |
성남고는 1938년 이태원에서 성남고등보통학교로 출발했다. 원래는 용산고보로 신청하였으나, 조선총독부에서 학교 명칭 정비방침에 따라 용산중학교가 이미 있는 상황이어서 성남고보로 바꿀 것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성남고보는 곧 성남중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41년에 대방동으로 이전했다.
원래 성남고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용마(龍馬)가 우물에서 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성남고 뒷산의 이름이 용마산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성남고 자리에는 공민왕 때 문신 서견의 무덤이 있었다. 서견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은거한 인물인데, 한양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서견의 무덤은 조선총독부의 경성부 정비 방침에 따라 1940년 경기도 의왕(내손동)으로 이장됐다. 인근에 있던 숙종의 여섯 번째 아들 연령군 묘와 연령군의 어머니 명빈(박씨) 묘도 있었는데, 마찬가지 이유로 충남 예산으로 이장됐다.
일제 강점기 성남고 일대는 군사훈련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42년(5월 21일) 경성제대, 경성의학전문 등 11개 대학과 전문대 학생 5000명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모의 군사훈련을 한 곳이 바로 성남고 일대였다.
도림리(지금의 신도림동)에 결집하여 경성으로 항하는 서군과 한강인도교 아래 사장에 집결하여 서군의 진격을 저지하러 떠나는 동군은 성남고 뒷산 '83고지'(용마산 정상)를 둘러싸고 치열한 가상 전투를 벌이는데, 이 광경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까지 나와 직접 참관했다(<매일신보>, 1942. 5. 22). |
(* [동작 민주올레]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⑦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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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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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고 학생들의 찬란한 역사 vs. 설립자의 부끄러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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