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의 길다산초당 오르는 길에 있는 일명 '뿌리의 길'은 역설적이게도 상처투성이다.
김종길
다산은 처음 유배를 살았던 강진 읍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붙였다. 마땅히 지녀야 할 네 가지(四宜)로 '담백한 생각(사의담, 思宜澹), 장엄한 용모(모의장, 貌宜莊), 과묵한 언어(언의인, 言宜認) 신중한 행동(동의중, 動宜重)'을 선비다운 덕목으로 꼽았다. 이때 가르친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 황상(黃裳, 1788~1870)과 이학래(李學來)였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도 출입하게 되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두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행운아였다.
다산은 47세이던 1808년 봄에 윤단(尹慱, 1744~1821)의 산정(山亭)인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을 초당으로 초빙한 이는 윤단의 아들인 윤규로(尹奎魯, 1769~1837)였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은 18년(1801~1818)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초당에서 11년가량(1808~1818)을 머물렀다.
다산이 윤단의 산정으로 오게 된 것은 어머니가 해남 윤씨였기 때문이다. 외가 쪽 친척의 소유였던 산정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가문이다.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인 윤단은 윤복의 6대손이고, 윤복의 형인 윤형의 5대손이 인물화에 탁월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기도 한데,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결국 산정의 주인인 윤단은 다산에게 먼 외가 친척인 셈이다. 윤단의 묘는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