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정 정원충재 권벌이 1526년에 집 서쪽에 조성한 사대부가의 별당 정원이다.
김종길
권벌이 청암정을 조성할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암정을 처음 지었을 때에는 온돌방이었고 둘레에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온돌방에 불을 지피자 바위가 소리 내어 울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겼는데, 마침 이곳을 지나던 고승이 "이 바위는 거북 형상인데 방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요"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거북이를 태울 수 있는 아궁이를 막고 거북이가 물에서 살 수 있도록 바위 주변을 사방으로 파내어 연못을 만들고 물을 채웠다. 그랬더니 그다음부터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충재집>의 <충재선생연보>에는 "병술년(49세)에 집의 서쪽에 작은 방을 만들어 충재라 이름 짓고, 또 서쪽 바위 위에 6칸의 정자를 세워 연못물을 둘렀는데, 이것이 청암정(靑巖亭)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야기와 사뭇 다르다.
권벌은 49세이던 1526년(중종 21) 봄에 집 서쪽에 서재인 충재를 짓고 한주당(寒栖堂)이라 했다. 서쪽 바위 위에는 정자를 짓고 구암정(龜巖亭)이라 했다가 청암정으로 바꿨다. 당시에는 마루만 6칸으로 아궁이가 없었고, 뒷날 큰아들 청암 권동보(權東輔, 1518~1592)가 방을 2칸 늘려 지었다. 연못에도 이미 물이 채워져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지만 바위 주위에 연못을 조성해 거북이가 헤엄치도록 한 그 상상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청암정정자의 북쪽에 높다랗게 솟은 바위 색이 매우 푸르러서 청암이라 했다고 한다.
김종길
충재와 청암정, 정원 관람의 백미
그럼, 청암정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의 <청암정 기문>에 "정자의 북쪽에 바위가 높다랗게 솟아 높이가 약 한 길 가량으로 그 색이 매우 푸르렀기 때문에 '청암'이라 이름 했다"고 적고 있어 그 연유를 알 수 있다.
청암정 정원은 사대부가의 별당 정원으로 고택 한쪽에 담을 둘러 별도 공간을 조성했다. 원래 있던 커다랗고 넓적한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정(丁) 자 모양의 정자를 짓고 그 주위로 연못을 조성한 정원이다. 정원은 척촉천(擲躅泉)이라 불리는 연못을 사이에 두고 충재와 청암정 두 건물이 마주하고 있는 단순한 구성이다.
▲척촉천정원은 척촉천(擲?泉)이라 불리는 연못을 사이에 두고 충재와 청암정 두 건물이 마주하고 있는 단순한 구성이다.
김종길
청암정 정원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문이다. 서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 문이 있다. 모두 작은 일각문인데, 바깥에서 들어가는 문이 둘이고 고택에서 들어가는 문이 하나다. 고택에서 들어가는 문은 주로 주인이, 앞쪽과 뒤쪽의 두 문은 손님이 사용했을 것이다. 그만큼 청암정이 개방적인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처음 정원에 들어서면 연못 좌우로 풍경을 훑어보고 충재 쪽마루에 걸터앉게 된다. 충재는 선비의 공간인 만큼 단아하고 간결하다. 권벌은 평소 충재에 거처했는데, 평생 <근사록近思錄>을 즐겨봐서 충재에 '근사재'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청암정충재와 청암정은 돌다리를 놓아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김종길
잠시 충재에 걸터앉아 정원 안 풍경을 감상했다면 이제 연못을 건널 차례다. 연못에는 돌다리(석교石橋)가 놓여 있고, 돌다리를 건너면 거북바위(구암龜巖)이고, 바위 위 돌계단(석계石階)을 오르면 정자(청암정靑巖亭)에 이른다. 거북바위를 중심으로 사방을 빙 둘러서 판 연못으로 인해 평범했던 바위 공간은 현실세계인 인간의 땅과 구분되는 이상세계인 무릉도원이 됐다.
현실과 이상의 두 세계를 잇는 다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어떤 장식성도 없는 그 간결함은 세속을 떠나는 선객의 발걸음 같다. 이 덕분에 청암정은 더욱 당당하고 거북바위와도 절묘하게 어울린다.
이것은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고 자연 암반을 투박하게 다듬은 돌계단과 바위 생김새 그대로 주춧돌 높이를 달리하여 기둥을 세운 정자에서도 나타난다. 모든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의 것을 살린 것이다.
▲청암정 돌다리어떤 장식성도 없는 그 간결함이야말로 세상사 다 비우고 떠나는 선객의 발걸음이다.
김종길
▲청암정정자마루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자연이 무시로 드나들어 호방한 선비의 기상을 느끼게 한다.
김종길
정자는 '정(丁)' 자 형으로 마루가 6칸이고 방이 2칸이다. 방의 좌우에는 누마루가 있다. 정자 마루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자연이 무시로 드나들어 호방한 선비의 기상을 느끼게 한다. 높다란 누마루는 주변 경치를 완상하기에 좋다.
이중환도 이런 경치를 두고 <택리지>에서 "청암정은 못 가운데 섬 같은 큰 돌 위에 있고, 사방으로 냇물이 고리처럼 감고 흘러 자못 경치가 그윽하다"고 했다.
충재와 청암정은 아주 대조적이다. 일단 건물 규모부터 다르다. 충재가 방 2칸에 마루 1칸의 소박한 건물이라면, 청암정은 방 2칸에 마루 6칸에 별도의 누마루까지 갖춘 호화로운 건물이다. 충재가 온돌 중심의 내향적인 서재로 낮은 곳에 있다면, 청암정은 마루 중심의 외향적인 정자로 높은 곳에 있다.
충재가 맞배지붕의 단아함으로 깊이 은둔한 형상이라면 청암정은 팔작지붕의 화려함으로 선계로 비상하는 형상이다. 충재가 주인이 학문을 연구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서재였다면, 청암정은 손님을 맞이하고 풍류를 즐기는 누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암정청암정은 팔작지붕의 화려함으로 선계로 비상하는 형상이다.
김종길
▲충재서재인 충재는 선비의 공간인 만큼 단아하고 간결하다. 맞배지붕의 단아함으로 깊이 은둔한 형상이다.
김종길
미수 허목이 남긴 마지막 글씨, 청암수석청암정에 오르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이다. 이 편액은 미수전(眉篆)'으로 유명한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전서체로 쓴 글씨이다. 허목은 권벌의 인품을 존경했고, 청암정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누차 들었다. 그래서 언제 한 번 찾아가보려 했으나 너무 연로해서 봉화까지 갈 수 없는 처지였다. 미수는 아쉽고 그리운 마음을 담아 글씨를 써 보냈다. 그때 그의 나이가 88세였다.
이 글씨는 1682년(숙종 8) 초여름, 미수 허목이 죽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충재 종가에서 사람을 보내 청암정 기문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미수는 그 대신 편액 글씨를 써 주었다. 그러면서 정자 안 가장 좋은 곳에 걸어줄 것을 청했다. 그 후 미수는 병석에 누웠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으니 '청암수석'은 그의 마지막 글씨가 됐다.
▲청암정의 편액과 바위글씨정자 안에 해서로 쓴 ‘청암정’은 매암 조식이 썼고, 청암수석은 전서체로 미숙 허목이 썼다. 바위에는 충재의 아들 청암 권동보가 쓴 ‘청암정’ 각자가 있다.
김종길
▲석천정사청암정 정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석천정사가 있다. 권동보가 아버지 권벌을 위해 지은 정사이다.
김종길
석천정사 |
청암정은 '스캔들', '바람의 화원', '동이' 등 각종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 청암정 정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석천정사가 있다. 권동보가 아버지 권벌을 위해 지은 정사인데, 울창한 소나무 숲을 등지고 석천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있는 매우 아름다운 정사이다. 아버지 권벌이 윤원형 등의 소윤(小尹) 일당을 비난한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삭주로 귀양 가서 죽자 권동보는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여 석천정사에서 여생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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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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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캔들' 배경된 정원, 유독 눈에 띄는 '마지막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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