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데드마스크 서거 당일 조각가 박승구가 떠서 남겼다. 경교장 지하에 복제품으로 전시 중이다.
홍윤호
한편, 대낮에 벌어진 사건의 실행자, 육군 포병 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CIC) 요원 안두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건 후 그는 현장에서 김구 비서진들에게 붙잡히고 경찰에 체포됐지만, 안두희가 현역 군인이라는 이유를 댄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들이닥쳐 그의 신병을 확보하고는 현장에 재빨리 도착한 헌병 지프에 강제로 실려 갔다. 그리고는 신속하게 군법 회의를 거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3개월 후 15년형으로 감형됐고, 복역 중 2계급 특진도 했다. 그러다 6.25 전쟁 이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군에 복귀했으며, 이후 별다른 문제 없이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할 때까지 편안하게 살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숨어다니기 시작했다. 1965년 곽태영 씨가 강원도 양구에서 그를 발견하고 목을 칼로 찔렀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1987년 민족정기 구현회장 권중희 씨는 경기도 김포에서 발견한 안두희를 몽둥이로 폭행하여 형무소에 갔다. 그러나 그는 출소 후에도 안두희를 계속 추적하여 두 차례나 더 그를 응징하기에 이른다.
결국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버스 운전 기사이자 평범한 가장이었던 박기서 씨가 자신이 직접 글자를 쓴 '정의봉'이라는 몽둥이에 얻어맞아 피살되었다. 길고 긴 추격전과 숨바꼭질 끝에 이루어진 결말이었다.
박기서 씨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사건 직후 교회에 가서 고해성사를 했고, 이를 들은 신부의 연락으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안두희가 인간적으로는 안 됐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했다 하며 초연하게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결국 1998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법적으로 공소 시효 기간이 끝난 상태에서 안두희를 방치한 정부와 사법부에 대항하여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한 그의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법질서가 온존하는 대한민국 체제에서 살인은 살인이다. 게다가 명령권자도 아닌, 한낱 하수인에 불과한, 다 죽어가는 노인을 폭행해 죽였다는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잔인한 범죄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인도 이를 인정하고 법적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보자. 역사와 국가가 진작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난 것은 아닐까. 벌건 대낮에 민족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살해하고도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 보호받으며 10년 이상을 호의호식하고, 정권이 바뀐 이후에 비로소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사람을 공소 시효 기간이 끝났다고 '법에 의한 면죄부'를 내리고 내버려 둔 것이 누구인가. 극단적인 결과지만, 그런 사람을 자연사하게 내버려 두면 그것이 국가와 민족의 수치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일을 벌인 것이 아닌가.
국가와 정부가 제 할 일을 하지 못할 때 국민은 들고일어난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에게 주어진 저항권이다. 국민의 소리를 무시하거나 미봉책으로 넘어가려 했을 때 국민뿐 아니라 역사는 심판대 위에 그들을 세울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