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농장을 운영하던 시절의 필자.
김지영
김지영 시민기자는 "어쩌다 노가다까지"하게 됐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이랬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여섯이었다. 늦깎이 육체 노동자가 된 사연은 이렇다.
넥타이를 풀고 빨간 장갑을 꼈다. 김지영 시민기자는 회사원 생활을 청산하고 귀농을 했다. 지난 2006년, 서울 떠나 경상도 산골짜기로 이사를 했다. 볼펜을 굴리던 손으로 닭을 길렀다. 달걀을 팔아 아내와 아들, 세 식구가 먹고살았다. 그는 연재기사 '노가다 전(傳)'을 여는 글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썼다.
"인생의 종착지를 아파트로 결론짓고 싶지 않았고, 소외된 노동이 아닌 주체적 노동의 주인공으로 한 번뿐인 내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양계장 주인장은 조연의 삶이었다. 그의 인생에 닭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닭은 매일 먹고 싸고 알을 낳았다. 뒤치다꺼리는 그의 몫이었다. 집사가 따로 없었다. 농장에 얽매어 닭에 발이 묶여 고단한 날을 보냈다. 그는 4년 만에 폐농을 선언하고, 제주도로 떠났다.
탐라에선 소박한 삶을 탐했다. 이번에도 외딴 마을 오지에 '언덕 위 하얀 집'을 지었다. 그는 펜션을 운영하며, 손님을 받았다. 바라던 대로 적게 벌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일이 생겼다. 아들의 진학 문제였다.
별난 아빠를 둔 탓일까. 김지영 시민기자의 아들은 보통의 아이들처럼 공부하길 바랐다. 그가 대안학교를 권했는데도 고등학교에서도 공교육을 받겠다고 했다. 이번엔 그가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다. 별을 보며, 출근하는 일을 하게 됐다. '노가다'였다.
"아이는 개별적 존재이자 별개의 우주이기 때문에 아이의 생각은 그것대로 존중받아 마땅했다. 나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 존중의 결과는 아비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귀결됐다. 돈을 벌어야 했다."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데모도가 됐다. 데모도는 건설 현장에서 기술자를 보조해 주는 사람을 일컫는 현장 용어다. 그는 생활 정보신문에 적힌 '목수 구함'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건설 현장의 목수 '오야지'가 면접을 봤다. 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밑바닥 인생 취급을 당했다. 목수를 한다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경험을 통해 그 눈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됐다. 그건 천박한 직업을 가진 보잘것없는 사람의 딱한 인생을 바라보는 눈동자였다. 한마디로 사람을 '후지게' 봤다. 우리 사회 뿌리 깊게 박힌 '노가다'를 바라보는 차별과 편견이었다.
"난 육체노동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노가다 판에서 뒹굴면서 아이들을 먹였고, 학비를 댔고, 차가운 잠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 굴러먹든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하면 굶지는 않는다는 속설은 노가다 판에서도 통한다. 그리고 사실 오랜 회사생활과 이런저런 직업을 거치고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성찰할 수 있었다. 그나마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가장 정직한 돈벌이 중 하나가 육체노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에겐 키보드나 망치나 똑같았다. 이걸 알리고 싶었다. 흔히들 '노가다'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하는 사람으로 여겼으나 실상은 달랐다. 실제 건설 현장에는 목수나 철근공, 전기공 같은 전문 기술자가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직업으로 신분을 나눴지만, '밥벌이'란 건 다르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일 뿐이었다.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들고 건설 현장으로 갔다.
목수 기자, '노가다'를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