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독락당 현판은 이산해가 썼고, 옥산정사는 이황이 썼다.
김종길
옥산별업사마광의 독락원처럼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에게 독락당은 결국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마음을 수양하며 홀로 즐기는 집이었다. 그런데 이언적은 왜 이곳을 은둔지로 택했을까. 어떤 이유로 이곳에 그만의 공간을 만들었을까. 그의 건축적인 안목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이 장대한 집을 짓고 유지하기 위한 경제력은 충분했을까. 이 모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언적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언적은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번(李蕃, 1461~1500)의 아들로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손소(孫昭, 1433~1484)이고, 외삼촌은 대학자 손중돈(孫仲暾, 1464~1529)이다. 외할아버지는 공신으로 정치적 명망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력을 소유했고, 외삼촌은 영남학파를 주도한 이름난 성리학자였다. 이언적은 외할아버지 손소의 터전에서 외삼촌 손중돈의 후광으로 경주 일대의 강력한 사족으로 성장했다.
옥산에 처음 발을 디딘 이는 아버지 이번이었다. 이번은 그가 살던 양동마을과 가깝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수가 수려했던 옥산 땅을 택하고 계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언적이 10세(1500) 때 아버지 이번이 사망했다. 결국 이언적은 어린 시절을 외가인 서백당에서 보냈다. 18세(1508)에 부인 박씨를 맞이하여 20세(1510)에 분가해서 여주이씨의 대종가인 살림집을 지었다. 이언적은 나중에 경상도관찰사 시절에 별당을 마저 짓고 당호를 무첨당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