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후손들은 특권의 유지와 활용뿐만 아니라 옥산별업을 지키기 위한 화의문 작성 등 자체의 노력도 계속됐다.
김종길
또한, 헌종 7년(1841)에 독락당의 계정 중수를 위해 업무를 나누고 사람을 배정한 <계정중수집사기溪亭重修執事記>를 보면 독락당과 계정을 지키고 관리하는 데에 얼마나 열성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체 총괄자인 도도감 2명, 실무 총괄에 별도감과 유사를 두었다. 유사는 각종 경비를 운영하는 전곡유사, 인력의 수급과 조정을 담담한 차용유사, 벌목을 담당하는 벌목유사, 기와를 담당하는 운와유사, 목재 운반을 담당하는 운목유사, 흙을 담당하는 운토유사 등으로 자재의 마련과 운반을 전담하는 유사를 두었다.
당시 계정 중수에 참여한 인사는 모두 이전인의 후손으로 29명이었으니 인부까지 합치면 상당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락당과 계정은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와 보수를 했으며 주로 문중 사람들이 재정과 실무를 관장했다.
이러한 노력들로 독락당은 이언적(1491~1553)에서 시작하여 서자인 이전인(1516~1568), 손자 이준(1540~1623), 이굉(1567~1653), 이홍후(1591~1675), 이익규(1625~1716), 이수담(1665~1704), 이의식(1692~1732), 이희성(1720~1805), 이립(1740~1805), 이진연(1778~1820), 이태수(1799~1857), 이기원(1830~1879), 이병유(1861~1922), 이윤덕(1886~1912), 이지락(1910~1963), 이원목(1928~1974), 이해철(1949~) 등 18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독락당의 살창이언적은 이 살창을 통해 물을 바라보고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고 자신을 수양했을 것이다.
김종길
이언적의 독락당 이후 행적 |
독락당에서 은거했던 이언적이 세상으로 다시 나아간 것은 47세(1537) 때였다.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중종이 그를 다시 부른 것이다. 그는 다시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 응교, 직제학을 맡았다. 이후 49세에 전주부윤, 50세에 예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등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51세에 수차례에 걸쳐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는 주로 노모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했는데, 53세(1543)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이때 무첨당과 동생을 위한 향단을 지었다. 55세에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여 우찬성에 제수하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56세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여 좌찬성에 제수됐다.
그러나 57세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제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평안도 강계로 유배됐다. 유배 중인 59세에 <대학장구보유>, 60세에 <봉선잡의>, <구인록>을 짓고 63세에 <중용구경연의>를 완성하지 못한 채 6년의 유배 생활 끝에 11월에 63세(1553)로 생을 마감했다. 유배 기간 동안 노모와 아우 이언괄의 부음을 받았다.
12월에 아들 이전인이 시신을 수습하고 반장(返葬)하여 이듬해인 1554년 2월에 경주에 도착했다. 선조 6년인 1573년에 옥산서원에 위패를 봉안하고 사액됐다.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문묘에 종사됐다.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동방 오현 중의 한 사람으로 받들어져 문묘에 배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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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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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에 걸쳐 완성한 정원... 그래서 이렇게 완벽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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