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구로구청에서 농성중인 시민들을 진압하는 경찰들. (아래) 문제의 구로을 미개봉 부재자 투표함으로 1993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구로선관위에서 어디론가 옮겨가고 있는 모습. 이 투표함은 29년 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 끝에 2016년 7월 22일 중앙선관위의 결정에 의해 개봉됐다. 결과는 4325표 중 노태우 3133, 김대중 575, 김영삼 404, 김종필 130 등으로 발표됐다.
민청련동지회
오후 6시 어수선한 속에서 투표가 종료되고, 8시쯤부터 전국적으로 개표가 진행됐다. 밤새워 개표가 진행된 결과 12월 17일 새벽에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6.6%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가 28.0%를 얻어 2위, 평민당 김대중 후보가 27.1%를 얻어 3위에 그쳤다.
6월항쟁에서 국민들이 치열하게 싸워 얻어낸 대통령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어이없게도 민주세력이 패배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광범한 관권 선거 개입이 있었고, 일부 투표소에서 부정 투·개표 사례들이 발견되긴 했으나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역시 양 김의 단일화 실패가 결정적 패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6월항쟁으로 타올랐던 국민의 민주화 열기는 급격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시민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체념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구로구청 사건과 김병곤의 결단모두가 패배감에 젖어 좌절하던 그 순간, 꺼져가는 투쟁의 불씨를 살려 보려고 안간힘을 쓴 이가 있었다. 김병곤이었다.
12월 17일 아침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침통한 분위기의 국본 사무실에 김대중 후보가 밤샘으로 핼쑥한 한 얼굴로 참모들과 방문해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광범한 관권, 금권 선거를 규탄하면서 이번 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선거결과에 승복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이때 구로구청 사건이 큰 사건으로 떠올랐다. 당시 구로구청에는 시민 수백 명이 부정투표함으로 의심되는 투표함을 점거하고 진실 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었다. 오후 들어서면서부터 구로구청에는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는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은 구청 앞마당에서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열었다.
민청련과 민통련 회원들도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민청련에서는 김병곤 부의장을 현장 책임자로 파견했고, 해당 지역의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과 주로 남민청 회원들이 농성대열에 합류했다.
사실 김병곤은 대통령선거가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치러졌기 때문에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선에서 민통련 상황실장을 맡았던 그는 선거 막판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선거 당일에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돕기 위해 차량을 여러 대 구해 부정선거 고발 현장을 쫓아다니는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국민운동본부 공정선거감시단 서울본부의 김희선 본부장으로부터 구로구청 사건 연락을 받은 그는 즉각 구로구청으로 가서 점거한 시민들과도 합류했다. 재야단체의 간부로서, 농성자 중 가장 연배가 높은 선배로서, 그는 마다치 않고 구로구청 투쟁의 지도자로 나섰다.
진압경찰의 진입이 예상되는 17일 저녁, 민통련에서는 문익환 의장과 임채정 사무처장이 구로구청으로 찾아가서 김병곤에게 현장에서 나올 것을 권유했다. 김병곤인들 왜 나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민청련 사건으로 2년여 감옥생활을 한 후 겨우 5개월 만에 다시 감옥에 갈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구로구청 상황은 그가 없으면 싸움을 지휘하기 어려웠고, 그 사실을 그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병곤은 그곳을 나올 것을 권하는 임채정에게 빙긋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