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구로구청 투쟁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민청련동지회
6월항쟁의 불씨를 살려보고자 했던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 농성도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십 명의 부상자와 구속자를 내고 종결됐다. 진압 과정에서 서울대 학생 양원태가 구청 옥상에서 추락해 척추 골절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민청련에서는 김병곤이 주범으로 구속됐다.
한편 선거 개표 결과가 발표되자 17일부터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한결같이 "부정선거 무효!"를 외쳤다.
국본 공정선거감시단은 전국의 개표소에 파견된 감시단으로부터 부정투개표 사례를 집계해 발표했고, 이는 곧바로 유인물로 만들어져 시위대가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선거운동 때보다는 못했지만 전국 대도시에서의 시위 열기는 상당히 뜨거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러 단체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시위를 기획했다. 민청련도 거기에 참여했다. 그들은 12월 18일 낮 12시 시청 앞 광장에서 "부정선거 규탄 및 군부독재 퇴진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일 시청 앞은 엄청난 수의 전투경찰과 백골단에 의해 점령당했고, 오가는 시민들의 동정은 모호했다. 선거 결과에 대해 잔뜩 불만인 듯한 표정도 있었고, 체념한 듯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대회는 열리지 못했고, 민청련 회원들은 누군가 나서주길 기대하며 시청 주위를 배회했다.
마침내 오후 2시경,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청 앞 지하도 입구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열은 2,300명 정도로 6월항쟁 때 비하면 아주 적은 규모였다. 경찰의 최루탄 발사와 백골단의 습격으로 시위대는 금방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흩어진 시위대는 청계천과 명동 한국은행 앞으로 이동하면서 도로를 점거해 반짝 시위를 하고 흩어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계속 시위를 이어나갔다. 어느덧 시위대에 동참하는 시민들도 늘어갔다.
시위대 사이에서는 누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저녁에 명동성당으로 집결하자!"는 구호가 번져나갔다. 6월항쟁 때 명동성당 농성이 전국적 시위를 이끌어나가는 구심점이 됐듯이 이번에도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투쟁을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과연 해가 질 무렵인 저녁 7시, 명동성당 앞에는 3천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그들은 즉석에서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열고 '선거무효 국민총궐기 명동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지도부는 중앙대 총학생회 간부들을 비롯한 대학생들과 각 시민단체 대표들이 맡았다. 민청련에서는 동민청 위원장 김성환이 민청련을 대표해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