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꽃부와 명예를 상징하는 꽃 중의 왕 모란꽃
조찬현
모란꽃 시인 영랑의 강진 생가에는 4월 하순에 모란이 핀다. 중학생 때 미술부 활동을 했던 나는 미술 선생님을 따라 강진읍에서 열리는 사생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했는데, 그날 김영랑 시인의 생가를 처음으로 가보았다. 모란이 흐드러지게 핀 눈부신 봄날이었다. 선생님은 활짝 핀 꽃향기를 맡다가 "아, 영랑의 향기!" 하면서 눈을 살며시 감았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모란꽃의 향기가 참으로 그윽하다는 것을.
<삼국유사> 선덕여왕 편에 모란꽃 이야기가 나온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꽃씨 3되를 보내 왔다. 신하들은 탐스럽고 아름다운 모란꽃 그림을 보고, 꽃씨를 대궐 안에 심으면 꽃향기가 넘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덕만공주(선덕여왕)는 대뜸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인 진평왕이 공주에게 그림과 씨앗만을 보고 어떻게 향기가 없는 줄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덕만공주는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는 줄 알았다면서, 꽃에 향기가 있으면 반드시 벌과 나비가 따르게 마련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 씨앗을 대궐 뜰에 심고 꽃이 핀 뒤 살펴보니 정말로 향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덕여왕의 영민함을 말하고자 하는 설화이지만 알고 보면 참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의 모란도에서는 나비를 일부러 그리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다. 중국어로 나비의 접(蝶)은 80세 노인을 칭하는 질(耋)과 발음이 같다고 하며, 그러기에 모란과 나비를 함께 그리면 부귀를 80세까지만 누리라는 뜻이 된다. 부귀영화를 바라는 끝없는 사람의 욕심에 의미를 제한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나비를 그려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에는 남쪽 지방보다 모란꽃이 더디게 핀다. 매화가 피고 지고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과 목련도 피고 지면, 5월 초쯤에 모란이 핀다. 덕수궁 정관헌 앞의 모란꽃이 유명하고, 조계사 옆 우정총국 화단의 모란꽃도 볼만하다. 서울에서 모란은 5월에 잠깐 피었다가 지기 때문에 만개한 꽃을 보려면 날짜를 잘 맞추어야 한다. 참 기품 있는 모란꽃 향기가 멀리까지 퍼지는 것은 꽃이 피는 시간이 아쉽도록 짧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지금도 모란꽃은 향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어느 해 모란꽃을 구경하려고 용산 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어린 자녀들과 나들이를 나온 가족을 보았다. 엄마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에게 "모란꽃은 향기가 나지 않는단다. 너희도 선덕여왕 위인전에서 보았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지식을 들려주는 것이 안타까워 "정말 모란꽃에 향기가 없는지 직접 한 번 맡아보세요"라고 웃으면서 말해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꽃향기를 맡은 그 가족은 모란꽃 향기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면서 놀라움을 표현했다.
또 한 번은 꽃의 향기가 짙으니 모란이 아니라 작약이라고 빡빡 우기는 사람도 보았다. 모란과 작약, 사람으로 치자면 형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꽃 모양과 피는 시기가 비슷하여서 구분하기 쉽지 않다.
신라 설총이 지은 우화 '화왕계(花王戒)'에 모란은 화중지왕(花中之王)으로 나온다. 꽃 중의 왕답게 모란꽃은 크고 화려하다. 다년생 초본식물인 작약(芍藥)과 비슷해 목작약이라고 하며, 작약은 초목단이라고 한다. 나무에 속하는 모란꽃이 먼저 피고 다년생 풀인 작약이 뒤를 잇는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참 많다. 이미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 그러나 틀렸던 것들이 너무 많다. 내가 출판사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꽤 유명한 작가를 만났다. 그 작가는 자신이 쓴 책을 나에게 선물하면서, 책의 표지를 열면 나오는 면지에 만년필로 내 이름을 쓴 다음 한문으로 '惠存(혜존)'이라고 쓰고 사인까지 하여 나에게 건네주었다.
저자의 서명이 들어간 책을 직접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감흥이 유달랐다. 나를 대접해주는 것 같았고 유대감도 느껴졌다. 그때의 인상이 참 깊었기에 '혜존'이란 말은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그 후로 많은 작가와 교류하면서 받은 책 선물이 지금은 책장 하나를 차지할 정도이다.
그런데 십중팔구 책의 면지에 '혜존'이라는 단어를 한자나 한글로 적었다. '혜존'은 국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받아 간직하여 주시라는 뜻으로, 자기의 저서나 작품 따위를 남에게 드릴 때 상대편의 이름 아래에 쓰는 말"이라는 풀이가 붙어 있다.
내놓을 거면 흔적이라도 없애주지...오래전 내 첫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편집이 진행되는 동안 마음이 참 설레고 뿌듯했다. 흔히 첫 작품을 '처녀작'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될 수 있으면 이 표현을 삼가고 있다. 언젠가 여성운동을 하는 어느 시인으로부터 '처녀작'이라는 단어에 성차별이 담겨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왜 '총각작'은 없느냐고 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처녀의 깨끗한 순결의 이미지를 떠올려서 만들어진 단어로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순결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무척이나 전투적이었던 그녀의 말투가 내 감정을 상당히 긁었다. 그래서 인상을 쓰면서 내가 사전을 편찬한 사람이 아니라서 왜 '총각작'이 없는지는 모르지만, 아무 죄 없는 나에게 왜 언성을 높이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던 일이 있다.
그 후로 '처녀작'은 꺼리는 단어가 되었다. 주제가 잠시 곁길로 샜지만,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기에 단어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다.
책 출간을 10일 정도 앞두고 책을 보내야 할 사람 목록을 적어 보니 100명 가까이 되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惠存'이라는 한자를 많이 연습했다. 저자의 서명이 있는 책을 선물로 받을 때마다 나도 꼭 해보고 싶은 소망은 내 책에 서명하여 선물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출간된 책을 손에 받아보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시울마저 뜨거워졌다. 그날 밤 정성껏 '아무개님 惠存'을 손이 뻐근하도록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