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먹은 나뭇잎벌레 먹은 나뭇잎을 보니 시 한 수가 뇌리를 스친다. 벌레 구멍을 통해 비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과연 멋있다!
이명수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뜻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고, 무척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리라. 시절 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지척에 두고도 못 만날 수 없다. 꽃도 그렇다.
야생화 감상에 취미를 가지고부터 계절마다 꽃이 피는 시기를 가늠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문득문득 지금쯤 어느 산 어느 곳에 가면 어떤 꽃이 피어날 것 같다고 그려보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직장에 얽매여 있는 몸이라 주중에는 갈 수 없고, 주말에도 날씨가 궂거나 일이 있으면 꽃을 보고 싶어도 못 보고 지나칠 때가 많다.
9년쯤 전, 남양주 서리산에 올랐다가 정상 부근에서 만개한 철쭉 군락을 만났었다. 한반도 지도 모양으로 조성된 철쭉꽃의 물결은 그야말로 장관이라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초록과 어우러진 그 고운 연분홍빛에 현기증이 일만큼 황홀했었다. 취한 듯 빠져들어 한참을 바라보며 '꽃멀미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 해마다 5월 그 무렵이 되면 주말을 택해 서리산을 올랐다. 그런데 번번이 조금 이르거나 조금 늦거나 해서 그토록 만발한 광경을 보지 못했다. 지난해는 하필이면 그 전날 폭우가 쏟아져 꽃이 우수수 떨어졌기에 무척 아쉬웠었다.
글을 모르면 문맹, 자연을 모르면?지난주 주말, 잠에서 깨어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5월 10일경에 서리산 철쭉꽃이 절정일 것이라는 정보를 보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주말을 기다렸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하늘이 울고 있었다.
산에 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고 했던 어느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섰을 때 빗발은 더욱 굵어져 있었다. 잠깐 실망감이 들었지만, 밝은 생각의 스위치를 켰다. 불을 켜면 어둠은 즉시 사라지게 된다. 서울에는 비가 오지만, 남양주 축령산에는 비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일기 예보는 틀릴 수도 있는 법이다. 만일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지 않고, 운이 좋으면 온 힘을 다해 터트린 철쭉꽃들의 열정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부러 시간 내어 찾아간 곳에서 꽃들의 향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 찾아온 것처럼 감동적이다. 정신적인 강렬한 감동은 오래가고, 언제라도 꺼내어 회상할 수 있는 무형의 재산이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된다.
춘천행 전철을 타고 가다가 어느 마을 길가에 풍성하게 핀 이팝나무꽃을 보았다. 유난히도 풍성하여 마치 나뭇잎 위에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는 듯했다. "저 꽃이 무슨 꽃인지 알아요?" 하고 아내에게 물었다. 가족끼리 여행을 다니면서 몇 번인가 똑같은 질문을 했었기에 이름은 물론이고 그 유래까지 잘 알고 있었다.
이팝나무에는 우리 민족의 가난했던 시절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이팝나무 꽃 피는 시기가 옛날에 보릿고개 무렵이었다. 그 시절엔 굶어 죽은 이가 나올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배고픔을 참아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 이팝나무 꽃이 멀리서 보면 마치 사발에 담긴 쌀밥 같다 하여 '이밥나무'라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가 가족들에게 꽃이나 나무 이름을 거듭 묻는 이유가 있다.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고 하는 것처럼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면 '컴맹', 자연 생태를 모르는 사람은 '생태맹'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청맹과니와 다름없다. 청맹(靑盲)은 겉보기에 멀쩡해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눈을 뻔히 뜨고도 '숙맥(菽麥)'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세상을 사는데 애로사항이 많을 것이다. 아무튼, 모르면 답답하고 손해 보는 일을 당하기 쉽다. 1000년 묵은 천종산삼이 눈앞에 있어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잡풀로 보일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에게 지칠 때는 모든 것을 받아주는 대자연의 위로가 필요하다. 말 없는 가운데 수많은 말을 하는 자연 속에서 위로받고 힘을 충전하여 꿋꿋하게 삶에 임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내 가족이 자연과 친밀히 교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꽃과 나무의 이름을 기회 있을 때마다 묻고 또 묻는다. 이름을 알게 되면 친밀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