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 자는 안방의 크기를 대폭 줄인 도면. 화장실 두 개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나의 뜻을 어떻게든 구현하려고 고생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거다, 싶지는 않았다.
선한공간연구소 엄현정 소장 제공.
이때까지만 해도 화장실 두 개는 살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안방의 위치가 마음에 걸렸다. 낮에는 비워둘 공간에 햇빛이 잘 드는 게 좋은가? 이른 아침 눈 부신 햇살에 눈을 뜨는 게 아침잠 많은 내게 좋은가? 아니었다. 이른바 문간방이라고 하는, 대문 옆 쪽으로 안방을 옮겨보기로 했다.
그런데 워낙 건물 면적이 작아서 모두 다 오밀조밀했다. 어느 한 곳이라도 확 키워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화장실 두 개를, 샤워실과 화장실의 분리를, 세면대의 독립을 포기했다. 도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능한 모든 곳에 다락을 넣어 최대한 수납 공간을 확보하기로 했다.
이 도면을 그리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가구와 가전제품 중 이사할 때 가지고 갈 것과 버리고 갈 것의 목록을 정하고, 각각의 모든 사이즈를 재야 했다. 통돌이 세탁기는 놓을 곳이 없으니 빌트인 드럼세탁기로, 김치냉장고와 일반냉장고 두 개는 같이 놓을 곳이 없으니 하나로 통합된 것으로, 스탠드 에어컨 역시 놓을 곳이 없으니 벽걸이 에어컨으로 교체해야 했다.
고장이 나면 고쳐 쓴다, 가급적이면 쓰던 걸 계속 쓰고 새 걸 안 사는 게 나의 모토였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냉장고는 20년, 김치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이 모두 10년은 훌쩍 넘은 것들이라 여기저기 고장이 나고, 삐걱대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졸지에 가전제품 매장에 가서 1년쯤 후에 구매할 가전제품의 목록을 살피고, 팸플릿을 얻어와 사이즈를 각각 표시해서 건축가에게 전달했다. 어디 가전제품뿐이겠는가. 가지고 있던 가구 역시 가로, 세로, 폭이 안 맞아서 거의 가지고 갈 수가 없을 듯했다. 어지간 하면 붙박이로 다시 짜는 걸로 전제하고, 있는 가구는 다 처분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모든 것은 공간의 협소함 때문이었다. 집 크기에 살림의 사이즈를 줄여야 했다. 원치 않게 미니멀리즘을 실현하게 생겼다. 정리하자고 마음을 먹으니 안 쓰고 묵은 살림들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깨달았다. 가전제품, 가구만이 아니라 옷이고 책이고 신발이고 가방이고 그릇이고 안 쓰고 쟁여두기만 한 것이 그득그득했다. 한꺼번에 정리하기도 일일 테니, 그때로부터 현재까지 나눠주고 버리는 게 일이다.
내가 많이 버렸고, 짐이 별로 없다는 말을 건축가는 '1'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우리집에 찾아와 매의 눈으로 집 안 곳곳을 스캔했다. 문이란 문은 다 열어보고, 책꽂이에 꽂힌 책 중 높이가 높은 책과 낮은 책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신발은 높은 게 많은지 낮은 게 많은지까지 체크했다.
"이것도 가져가실 건가요?"그건 가져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더 버리고 더 버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완성 직전의 도면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직전일 뿐, 아직 완성은 아니었다. 완성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