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대문 안에 어떤 공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만나는 공간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가 역시 집 짓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황우섭
집을 사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이럴까 저럴까 갈피를 잡지 못했다. 건축가와 지지고 볶으며 공간의 성격을 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어떤 형태로 집을 수리할 것인가를 정한 뒤, 구체적으로 내부 공간을 디자인할 때가 되었다. 살림집으로만 쓸 것인가, 아닌가를 정하는 일부터가 내부 공간 설계의 시작이었다.
나는 결정했다. 아무래도 책 만드는 일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오래오래 내가 원하는 책을 내 손으로 차곡차곡 만들어나가고 싶었다. 나로 하여금 이런 결심을 하게 한 동기가 있다.
뜻밖에 나는 지난 2~3여 년 동안 퇴사와 이직, 다시 퇴사를 반복하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는 사연은 제각각일지언정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때로는 아쉽고 때로는 화나고 때로는 서글프다. 그런데, 퇴사와 이직, 퇴사를 거듭하는 내내 공교롭게도 나에게는 몇 장의 계약서가 줄곧 따라다녔다.
출판사에 다니면서 내가 하던 일은 새로운 기획을 저자에게 제안하고, 저자의 집필을 기다렸다가 원고가 완성되면 편집을 하는 것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진행한 기획은 그것이 누구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이든 대개 회사를 그만둘 때 두고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매우 애매한 상황이 발생하긴 하지만, 저자들 입장에서는 회사를 그만두는 편집자의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출간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는 상황을 함께 받아들이기는 대략 난감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기획한 사람이나 저자나 모두 서로의 입장을 존중, 양해하고 물러난다. 그런데 몇 장의 계약서가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나의 갈짓자 행보로 대부분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노라 다독이며 저자들께 죄송한 마음만 품고 지냈다.
그런데 이 한 장의 계약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뜻밖에 퇴사를 하게 되었노라, 계약서의 당사자인 저자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이분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계약도 없던 걸로 하자고 하셨다. 내가 다닌 회사의 명망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 책의 첫 단추부터 같이 시작했는데, 한 사람이 그만두면 안 하는 게 나을 거라는 말씀이셨다.
집필의 동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다 내 탓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다른 곳으로 이직한 뒤 나는 서둘러 다시 계약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집필의 동력이 다시 발동하기도 전에 나는 덜커덕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다시 조직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이 분은 역시 또 같은 이유로 나를 택하셨다.
나는 다 쓰러져가는 한옥 마당에 앉아 내가 책임져야 할 계약서와 내가 원하는 삶을 맥락없이 읊조리고 있었다. 계약서는 쓰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책을 만들자고 이야기를 해놓은 분들도 여럿이었다.
나는 내 말의 책임을 져야 했고, 기꺼이 그 책임을 지고 싶었다. 샘도 많고 욕심도 많은 나는 다른 누가 그 책들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전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내 손으로 다듬던 원고가 다른 이의 손에서 책으로 태어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가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책 만드는 일을 그냥 쭉 하는 것말고 다른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래오래 내가 원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회사를 꾸리는 것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나는 마음을 굳혔고 이제 뒤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했다.
한옥의 구석구석은 그래서 살림집과 출판사 사무실을 겸하는 공간으로 정비되었다. 건축가는 가뜩이나 작은 집에 살림집과 출판사 사무실로 쓸 공간, 게다가 남편의 작업실까지 꾸리느라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아마도 다음 번 연재쯤에 소개할 이 집의 공간은 그래서 매우 단순하면서도 각자의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나갔다.
원래는 집이 완공되면서 출판사의 신호탄을 쏘아올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너무 많이 겪어왔다. 나는 뭔가 하나라도 확실하게 진행하는 게 낫겠노라 생각했다.
나 때문에 이미 몇 차례 집필, 중단, 재개, 중단을 한 저자께 내 뜻을 알렸다. 저자는 명망 있는 조직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롯이 맨 땅에서 시작하겠다는 내 손을 기꺼이 맞잡아줬다. 1인 출판사의 불안과 연약함에 대한 어떤 염려도 내비치지 않으셨다.
생각해보면 인연이란 매우 오묘하다. 나는 지난 네 번째 연재글에서 한옥을 짓게 된 것이 두 권의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중 한 권의 저자가 바로 지금 나의 한옥을 지어주는 목수님이라는 이야기도 했던가. 그분이 지은 작은 한옥 한 채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이가 바로 그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