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쪽에서 찍은 사진. 정면 왼쪽 방이 실측도의 <방2>고, 오른쪽 유리문은 대문과 통하는 중문이다. 오른쪽 방은 앞 사진에서 본 <방3>이다.
황우섭
건축가의 언어는 숫자에서 시작해서 숫자로 끝난다. 0.1밀리미터의 오차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결기가 느껴질 정도다. 방과 가로세로 사이즈와 바닥부터 천장까지, 숫자의 각이 나오지 않는 한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 또 있다. 바로 선이다. 건축주의 모호하기 짝이 없는 언어를 듣고 있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선들이 춤을 춘다. 집 하나를 둘러싸고 그가 도면 위에 그은 선들의 개수를 세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시공자의 언어는 할 수 있다 또는 할 수 없다이다. 매우 간명하다. 건축주의 모호함과 건추가의 도면 위의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제아무리 건축주가 꿈을 읊조리고, 건축가가 선을 그어도, 현장의 사정상 그럴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발은 굳건하게 땅을 딛고 서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언어의 밑바닥에는 매우 엄정한 전제가 깔려 있다. 바로 예산이다. 돈이 풍족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100만 원을 가진 사람은 200만 원의 집을 꿈꾼다. 늘 돈이 부족하다. 1000만 원을 가진 사람은 풍족할까? 아니다. 그는 1500만 원의 집을 꿈꾼다.
역시 돈이 부족하다. 예산의 규모가 어느 수준이냐가 다를 뿐, 늘 예산은 쪼들린다. 그 한정된 예산 안에서 건축주의 모호한 꿈과 건축가의 무수한 선과 시공자의 구현 가능성을 이루어내야 하니, 한 채의 집을 짓는 행위는 그 과정이 바로 아트다.
'한옥을 짓는 데 무슨 설계?' 처음 한옥을 짓기 위해 건축가를 알아본다고 했을 때 적잖이 들었던 질문이다.
"한옥은 양옥과 달리 어림잡아 짓는 거 아냐?"
그때마다 나는 대답했다.
"아니다."따라나오는 질문은 또 이랬다.
"집 사는 것보다 그 돈이 더 들겠네."그때마다 나는 또 대답했다.
"배보다 배꼽이 크지는 않겠지만, 이 집에서 엄청난 배꼽을 보게 될 것이다."액면으로 보자면 다 쓰러져 가는 한옥을 사면서, 나는 대충 쓸고 닦고 조이고 기름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각오를 했다. 100년 가까이 지탱해온 이 집을 제대로 고쳐서 앞으로 100년을 버티는 집으로 만들겠노라고. 그런 다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이왕 시작한 일 제대로 하고 싶었다. 비록 집은 작지만, 이 집을 지어가는 과정 속에 나라는 사람을 투영하고 다름 아닌 '나'를 구현하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며 쌓은 경험과 가치관, 보고 들은 모든 것의 총합을 이 집에 부여하고 싶었다. 내가 곧 집이며, 집이 곧 나인 그런 공간을 꿈꿨다.
2017년 여름부터 2018년 여름까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매우 명확한 과정을 통해 나의 한계와 현실을 잘 인식하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싶었다. 집이 부실하면 내가 부실한 셈이니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과정과 결과 모두 내 삶의 의미 있는 순간이길 바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타협하지 않고, 꼼꼼하게 따져가며 짓고 싶었다.
그러자면... 다 필요없고!! 무조건 파트너를 잘 만나야 했다.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옮겨 다닐 때마다 이 집에서 평생 살겠다는 마음으로 대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해왔다. 나름 전문업체를 골라서, 엄격하게 고른다고 골랐지만 한계는 명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