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향교는 1897년 3월 착공을 시작해 8월 낙성식을 가졌다. 폐진 건물들의 목재를 운반하고, 벌목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97년 10월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꿈에 따라 '조선'이라는 국호 아래 마지작으로 지어진 '향교'인 셈이다.
완도신문
완도향교, 조선시대(고종 34년) 마지막 지어진 향교조선시대 영암, 강진, 장흥 등지에 부속되어 있던 완도 지역이 독립된 행정체제를 갖춘 때는 1896년 2월 3일 칙령 제13호에 의해서다. 1521년 설진된 가리포진은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기 전 374년간의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수군 진으로서 역할에 막을 내리게 된다.
완도군의 창설 과정에는 갑신정변의 여파로 고금도에 유배 왔던 이도재 공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내무대신 박정양은 도서 지역 주민들이 부당하게 취급되는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완도군을 비롯해 돌산군, 지도군 등 3개의 도서군을 만들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신설된 군이 군청 관사보다 지역교육기관인 향교를 먼저 설립했다. 이유인 즉, 완도 설군의 공신인 문정공 이도재 공과 설군 과정에서 손발을 맞춘 완도 죽청리 태생 향도유사 침천 김광선 선생의 의지가 컸다.
당시 섬은 낙도 오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도 갖지 못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취약해 글을 몰랐다. 이로 인하여 천민 취급을 받고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괄시를 당했다. 배움에 대한 향수는 간절했고 절대적 가치였다. 독립한 완도 사람들은 육지와 같은 위상을 갖고자 했다. 여기에 김광선 선생은 "도덕과 인륜의 바람을 일으켜 섬사람의 오명을 씻고자 했다"고 '자서행록'에서 밝히고 있다.
군 초창기에는 재정의 곤란으로 착수할 수 없었으나 당시 탁지부(度支部, 조선 말기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와 제도(諸島, 여러 섬)의 도움으로 건설하게 됐다. 향교 설립은 죽청리에 터를 잡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죽청리에 장차 군청도 옮길 상정으로 관민이 협의하여 1897년 3월 착공을 시작해 8월 낙성식을 가졌다. 폐진 건물들의 목재를 운반하고, 벌목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성전만 새로 벌목한 목재를 사용해 지었다. 동재는 고금진 동헌, 서재는 신지 동헌, 그리고 명륜당은 노화 동헌의 목재를 사용했다. 1897년 10월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꿈에 따라 '조선'이라는 국호 아래 마지작으로 지어진 '향교'인 셈이다.
1903년에는 유생의 강학을 위한 양사재를 군수의 도움으로 건설하고, 향안을 작성했다. 1934년 향교를 중수했으며, 1942년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1947년 동재를 중수했다. 그 뒤 1967년에 전면 보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고사(庫舍)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완도향교는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