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이 다 떠난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알베르게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차노휘
만시야에서 약국에 들렀다가 공원에서 소독하며 해바라기 하고 있을 때 슈퍼에 다녀온 데미안이 옆에 앉았다. 그는 나를 위해서, 나처럼 신발을 벗었다. 물집 하나 없는 그의 발은 깨끗했다. 부러운 눈길로 그의 발을 훑었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그저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발. 걷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발. 그 발이 내게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좀 더 일찍 알아야 했다고 자책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노휘, 네 식량은 태양이구나." 태양처럼 환하게 웃는 그가 체리를 내 앞에 내놓으면서 앉았다. 나는 꿈쩍않고, 눈부시나 습기가 거의 없는 햇살에 몸을 맡긴 채 과즙 많은 체리에 손을 내밀었다. 고요가 한 움큼 내 입속에서 깨지는 듯했다. 그때, 데미안이 목소리를 조금 낮춰 심각하게 물었다.
"왜, 너는 버스 탈 생각을 하지 않니?" 입속에서 과즙과 함께 달콤하게 스며들던 고요가 와장창 깨져버렸다. 나는 데미안에 경계태세를 취하면서 쏘아봤다. 정말 내가 버스를 타는 대상으로 보였다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었다. 나는 각을 세워 대꾸했다.
"너, 나한테 농담하니? 나는 그런 생각을 결코 해본 적이 없어. 하루 여기서 더 머무르면 머물렀지 버스는 타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오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내 합리화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다시 데미안의 부축을 받고 절뚝거리며 침대에 와서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읽었던 책에서 마침내 내 합리화를 찾았던 것이다. 존 브리얼리의 <산티아고 가이드북> 책 속에서 다음 코스에 관한 안내를 읽다가 이런 표현을 발견했다(p.251).
…번잡한 길들을 따라 부르고스(Burgos)에 갔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이전의 경험이 어떠했건 이번 순례 여행이 무엇이건 간에, 만시야에서 레온 시내 중심가로 향하는 정규 노선을 이용하면 이 주도로의 번잡함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버스를 타는 옵션을 선택한다면, 걸어서 가는 동료 순례자를 위해 기도를 해주자….
저자는 어떤 곳에서도 버스를 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유독 이 구간에서만 '정규 노선을 이용하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만큼 주도로 옆에 순례길이 있어서 사색을 방해한다는 다른 뜻이었다. 오죽 순례길 답지 않으면 버스를 타라고 할까. 내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확실히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그 다음날 내린 비였다.
비를 맞고 젖은 신발 속에 그렇지 않아도 피부 껍질이 벗겨진 곳에 물이 들어가 질퍽거릴 것을 생각하니, 아, 물집 공포가 또다시 몰려왔다. 이제 겨우 절반 걸었을 뿐이다. 이번만 눈 감아 보자. 나는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을 놓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비가 온 것이 고맙기도 했다. 4~5시간 걸려야 걸을 수 있는 20km를 버스 타면 30여 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