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 추모각 생가 옆에 추모각이 있는데, 내부에 남자현의 사진이 걸려 있다.
홍윤호
남자현은 스스로 손가락 세 개를 자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독립군 내부에 분파가 생기고 그들끼리 싸우는 일이 생기자, 그녀는 7일간 금식기도를 한 후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서 간부들을 소집한 후 통합을 호소했다. 그의 정성과 각오에 마음이 움직인 독립군 간부들이 분쟁을 접고 화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을 때 회의가 성과를 보지 못하고 결렬되자, 다시 손가락을 잘라 민족의 통합을 호소했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잘라 흰 수건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녀는 1927년 길림대검거 사건으로 안창호, 김동삼 등 47명의 독립운동가가 체포되고 일본 경찰에 인도될 위기에 처하자, 안창호의 집안 친척으로 위장하고 면회를 허락받아 감옥에 들어간 다음 안창호의 밀명을 받아 이를 관계자에게 전달, 이들을 일본 경찰에 인도하는 데 반대하는 여론을 일으켜 결국 석방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그녀는 두 번 암살을 시도했는데, 1926년 54세 때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들어왔다가 송학선이란 청년이 먼저 암살을 위해 움직이다가 체포되는 바람에 포기하게 된다.
다음으로 61세 때인 1933년 만주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유시 처단을 목표로 허름한 중국 노파로 변장하여 폭탄 투척을 실행하기 위해 움직이다가 한국인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6개월 동안 일제의 악랄한 고문과 심문이 이어졌지만 이미 60대의 여성인 남자현은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며 단식으로 일제에 투쟁하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남자현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서 아들과 손자가 찾아오자 감춰둔 249원 80전을 꺼내어 200원은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내놓고, 나머지는 손자와 친정 손자의 교육비에 쓰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미음이라도 들기를 원하는 아들 앞에서 그녀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달려 있다."이후 남자현의 아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성실하게 지켰다. 그는 해방 후 삼일절 기념식장에서 임시정부 요인에게 200원의 독립축하금을 전달하였다. 그 후 1962년 그녀에게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