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여 년 전부터 이 자리에 있던, 오래되고 낡은 이 집은 계약과 동시에 연정의 대상이 되었다.
황우섭
나에게도 세월은 흘렀다. 나이가 들었고,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삶을 꾸리고 싶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었다. 그것의 전제는 공간의 마련이었다. 아파트는 평수와 위치에 따라 매우 세부적으로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발품의 의미가 그리 크지 않다. 구조도 엇비슷해 선택의 여지 역시 크지 않고 크게 낭패 볼 일도 많지 않다. 어느 동네에 살 것인가만 정하면, 나머지는 인터넷과 부동산 사무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단독주택은 같은 동네에서 이웃하고 있는 집들끼리도 가격대는 천차만별이고, 집의 사정도 각양각색이다. 여기에 더해 집을 내놓는 집주인의 상황에 따라 가격은 등락을 거듭한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으면 결정은 몹시 어렵다.
그래서 발품만이 답이다. 시간이 될 때마다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은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이다. 서울 오래된 동네를 보러 다니며 실망하는 날이 많았다. 깨끗한 동네의 집은 너무 컸고, 너무 비쌌다. 내 주머니 사정에 맞는 곳들은 집 한 채를 둘러싸고 사방이 모두 빌라촌이었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무질서하고 지저분한 골목길을 돌아나와 깨끗하게 관리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설 때면 '나는 왜 굳이 땅에 발을 딛고 살려 하는가'라는 자문이 여지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라는 단어에 함께 따라나오는 그 이미지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