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이 문제나 증거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은밀한 피해자는 여전히 은밀한 폭력을 입증할 방법을 찾지 못해 자신의 허물을 탓하며 자책하며 살아야 한다
pexel
#미투최근 #미투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조금씩 미묘해지고 있다.
특히나 "경험"만으로 "증거 없이 폭로를 이어가는" #미투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으며, 오히려 폭로를 이어간 여성들을 처벌하자는 주장이 일고 있다.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알리바이", "증거", "증인"과 같은 것들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밀한 공간에서 권력의 우위를 가진 두 사람 사이 일어난 범행에 증거, 알리바이와 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과연 합리적인 걸까.
뜻밖의 성폭력은 뜻밖의 납치, 고문 피해와 다르지 않다. 은밀한 시간과 공간에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야기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고문피해자들의 진술. 이는 은밀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오랫 동안 숨죽여 오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폭로를 이어가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진술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장의 진위도 몹시 중요하다. 그러나 피해자의 피해를 귀담아 듣고 그 사실을 입증하려는 노력은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기사 전달의 미흡함으로 합리적 이해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알리바이 문제나 증거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은밀한 피해자는 여전히 은밀한 폭력을 입증할 방법을 찾지 못해 자신의 허물을 탓하며 자책하며 살아야 한다.
만에 하나 피해자의 주장이 잘못된 주장이거나 허위의 주장이라면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론의 처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 지켜왔던 가치, 즉 민주절차에 의한 처벌이면 족할 것이다.
피해 사실을 주장하는 데 혹여 일반 개인에게 피해 받은 피해자와 재벌·정치인에게 피해 받은 이들 사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진보의 가치를 지녔다고 해서 그들에게 피해 받은 피해자들에게 더욱 더 엄격한 검증과 증거, 증인들을 요구한다면, 그리고 그 폭로의 의도를 의심한다면 결국 이 미투 운동 역시 권력의 프레임에 가둬지고 말 것이다.
권력과 기득권 세력이라면 그 증거 싸움은 기울어진 운동장인 것이다. 피해자는 개인이며, 권력은 수많은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이 형성한 구조이다. 이 싸움이 공정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면 그것 자체가 부당한 싸움을 방조하는 것일 수 있다.
권위주의 정권은 고문 피해자들의 피해사실 자체를 희석시키거나 진실을 폄훼하기 위해 그들을 빨갱이, 종북, 투사 등으로 이념등치 하며 진실을 왜곡시키려 노력했다. 마찬가지로 #미투 피해자들을 더 이상 권력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길 바랄뿐이다.
개인의 일상에 처해지는 폭력은 그 자체가 권력과 구조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다. 성폭력 문제가 광범위하게 일상화되고, 그 문화가 당연시 되어 어느 곳에 하소연해도 들어줄 곳 없던 지난 시간을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상처에는 좋은 상처, 나쁜 상처, 합리적인 상처나 불합리한 상처가 없다.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 그 상처를 치유로 바라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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