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지역. 점선은 한양 도성이고, 갈색은 정세권이 개발한 지역.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의 한 페이지.
김종성
물론 사업적 목적이 밑바당이 됐겠지만, 정세권의 행동에는 민족 사랑이 담겨 있었다. 도시계획학 학자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경민 교수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에 따르면, 정세권의 둘째 딸인 고 정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일본인들이 발붙일 곳을 줄이고자 주택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사업계획을 짜고 건축현장을 돌아보고 장부를 들여다보는 그의 머릿속에 '민족'이란 두 글자가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딸에게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점은 삶의 궤적에서도 드러난다.
정세권은 1888년 경상도 고성군 하이면에서 출생했다. 농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가난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 집안이 일어섰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영특했던 그는 진주사범학교를 나온 뒤 20대 초반부터 면장 생활을 했다. 20세 때인 1908년부터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22세 때인 1910년부터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12년에 면장을 그만둔 그는 1919년 서울로 이주했다. 그때 수중에 2만 원이 있었다. 20칸짜리 한옥 두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기둥 2개 사이의 공간을 1칸이라고 한다. 기둥이 3개면 2칸이다. 2만 원을 종잣돈으로 1920년에 건양사란 건축회사를 차린 그는 10년도 안 돼 대표적인 부동산 재벌이 되었다. 그 재력을 기반으로 일본인들의 '북진'에 맞서 한옥마을을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불순'한 사업가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운동에 돈도 많이 썼다. 사업에서 번 돈으로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에 건물을 기증했다. 조선어학회가 1935년 발간한 <한글> 제3권 제6호에 실린 '조선어학회의 발전'이란 글에서 한글학자 이극로는 이렇게 말했다.
"정세권 씨로부터 서울 화동 129번지 2층 양옥 한 채를 조선어학회 회관으로 감사히 제공받게 되었다. ··· 우리 조선어학회는 조선 사회에 대하여, 특별히 정세권 씨에 대하여 감사함을 마지 아니하는 동시에 ···."
돈 쓰는 걸 보면, 그 사람 마음이 어디로 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일반인보다 돈이 더욱 절실한 사업가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정세권은 힘들게 번 돈을 위험한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가 무엇을 중시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인 건축 청부업자가 많았다. 이들이 총독부의 지원 하에 조선에서의 건축사업을 주도했다. 2006년에 <대한건축학회 논문집>에 실린 이금도·서치상의 '조선총독부 발주공사의 입찰방식과 일본 청부업자의 수주독점 형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래의 '같은 기간'이란 표현은 1922년부터 1932년까지를 지칭한다.
"일본 건설청부업자 47개 사가 같은 기간 동안 청부한 금액은 당시 조선에서의 총공사청부액의 약 60%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같은 기간'은 정세권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정세권을 포함한 조선인 업자들의 사업 여건이 극도로 안 좋을 때였다. 이런 시기에 일본 업자들과 경쟁하며 힘겹게 벌어들인 돈을 정세권은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바쳤다. 그가 돈과 민족 중 무엇을 더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조선의 집터를 지킨 건축가, 자신의 집을 빼앗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