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련 탄압 시기에 신분이 노출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은 [민중신문] 팀의 유기홍(왼쪽)과 유재상(오른쪽)
민청련동지회
여성부 조직도 탄압 국면에 적응했다. 이전에는 민청련 조직이 공개영역의 운영위원회와 비공개 상임위원회로 나뉘어 있었다. 여성운동의 경우, 운영위원회 내에서 여성부장 1인이 연대 사업을 담당했고, 상임위원회에는 여성분과를 설치해 정책 입안과 교육·연구 부문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탄압 국면에서는 조직 체계를 단일화했다. 여성부와 여성분과 조직을 상임위원회 산하 여성국으로 재편했다. 이 체제에서 밖으로는 다른 여성단체들과의 연대투쟁을 이끌어내고, 안으로는 여성 회원들을 비공개 가두 선전전에 지속적으로 동원해나갔다.
이리하여 탄압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 체계가 짜였다. 앞 시기의 집행부는 공개와 비공개의 2중 체제였다. 공개된 의장단과 운영위원회는 제1진이고, 비공개 상임위원회는 제2진이었다. 하지만 탄압으로 인해 체제가 바뀌었다. 제1진은 구속되거나 잠복 상태에 들어갔고, 공개 영역은 위축됐다. 이제 집행부는 비공개 단일체제로 재편됐다.
민청련은 조직체계를 정비함과 동시에 투쟁 대오를 가다듬었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탄압 국면에 맞서는 고문 수사 반대 투쟁이었다. 민청련은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투쟁위원회'(아래 고문투위)를 설립하여, 탄압 국면에 맞서는 항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고문투위의 활약상은 두드러졌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과 결합하여 과감한 농성 투쟁을 연이어 벌였으며, 그에 기반해 활발한 연대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야당 정치세력까지 포함한 광범한 반독재연합전선을 조직했고, 민가협 설립마저 이끌어냈다.
탄압 돌파는 투쟁으로1985년 10월에는 세계은행(IBRD)·국제통화기금(IMF) 서울총회가 예정돼 있어 이에 대한 반대 투쟁에 힘을 쏟았다. 이 총회는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힐튼호텔에서 개최됐는데 가맹국 148개국의 재무장관을 비롯한 대표 3,200여 명이 참석했고, 리셉션만 370여 회에 달하는 호화판 행사였다. 취재기자들의 솔직한 토로에 의하면, 총회 개최국이 누리는 실익은 별로 없고 예산 낭비에 불과한 국제회의였다.
민청련은 이 국제회의의 본질을 폭로하는 자료집 <IMF·IBRD 서울 총회와 민중민주화운동>을 발행하고, 전단과 스티커 등의 선전물을 살포했다. 10월 4일에는 민통련 등 28개 민주화운동 단체와 더불어 공동성명서를 발표했으며, 10월 8일에는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서, 민통련 가맹단체와 EYC 등 청년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것이었다. 300명 정도의 소규모 시위대가 청량리 미주상가 앞길에서 "외채정권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께 전단을 뿌리며 15분간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시기에 민청련이 역점을 둔 또 하나의 투쟁이 있었다. 개헌투쟁이 그것이다. 민청련은 고문투위와 함께 '민주제개헌투쟁위원회'(개헌투위)를 자기 내부에 조직할 정도로 이것을 중시했다. 그러나 개헌투위의 활동은 기대 수준에 현저히 못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