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논쟁 이후 민청련을 탈퇴한 한경남 의장(왼쪽)과 천영초 상임위원회 위원장(오른쪽)
민청련동지회
탈퇴하는 회원이 많았던 데에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던 마음 속 규범이 영향을 미쳤다. 그 시기에는 학생운동을 마친 사람은 마땅히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기층 민중운동을 강화하는 데에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당시 정세도 영향을 끼쳤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이후에 노동운동 내에서 정치투쟁 그룹이 활성화하던 시기였다. 그 결실로서 출현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은 전체 민중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거대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민청련 회원들은 서둘러 노동 현장으로 이전하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민청련의 조직 기반은 큰 타격을 받았다. 6차 총회 이전에는 계반과 각급 기구에 망라된 민청련 회원 숫자가 400∼500명 정도였다. AB논쟁은 회원 숫자를 감소시켰다. 논쟁이 끝난 이후에 그 숫자는 50%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평가된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해서 탈퇴를 결행하는 것은 공동체의 논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행위였다. 조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논쟁이 왜 이처럼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는가? AB 논쟁이 조직의 분열과 약화로 귀결된 원인에 대해서 민청련은 뒷날 자체 분석의 결과를 내놓았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민청련의 조직 기반을 학생운동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비판 의식과 동지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운동 출신자의 규합에만 힘썼을 뿐, 독자적인 회원 재생산을 꾀하지 않았다.
둘째, 학생운동 출신자였기에 학연에 민감했다. 출신 학교와 써클 등의 차이가 구성원들 내부에 균열을 가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학생 출신이기에 이론적 승부욕을 갖기 쉬웠다. 내부 토론과정에서 상대방에게 밀리거나 지기 싫어했다. 따라서 다수결에 승복하지 않고 분파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회원 감소와 함께 민청련의 위상과 영향력도 축소됐다. 민청련은 출범 초기부터 민주화운동 단체들 간의 연대에 힘을 기울였고, 또 노동운동 세력과의 연대 활동에도 관여해 왔다. 이 두 갈래 연대 활동은 총체적인 조망과 방향 설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민청련의 위상이 위축됨에 따라 상황이 일변했다. 민청련을 향한 구심력보다도 외부 운동을 향한 원심력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어느 쪽과의 연대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됐다. 그 틈은 어느새 넘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벌어져 갔다.
김희택 집행부의 출범새 집행부가 출범했다. 6인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선출됐다. 김희택 의장을 비롯하여 최민화, 김병곤, 박우섭, 이범영, 윤여연 등이 중앙위원이 됐다. 이미 구속됐거나 수배중인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최민화, 김병곤은 구속중이었고, 박우섭은 6차총회가 끝난 이튿날 체포됐다. 다른 3인은 지명 수배중이었다. 도망자의 처지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들은 지도력을 발휘했다. 윤여연이 운영위원장을 겸했다. 김근태 초대 의장에 뒤이어, 짧았던 한경남 의장 체제를 이어받아 세 번째 의장 리더십이 형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