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르코 수도원 전경사보나롤라는 이곳에서 대중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나중에는 두오모 성당에서 설교를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박기철
사보나롤라는 교회의 부패를 고발하며 개혁을 주창했다. 특히 당시 새롭게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6세의 개인사를 들추며 소위 '저격'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황 중 하나로 '교황계의 네로'라고 불릴 정도로 탐욕스럽고 잔인했다. 정부가 6명이나 되었고, 슬하에 자녀도 여럿 두고 있었다.
또한, 사보나롤라는 로렌체 데 메디치를 비롯한 메디치 가문 역시 비판했다. 그는 피렌체를 하느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향락과 사치의 도시로 만든 주범이 메디치 가문이라고 봤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를 독재자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신성 공화국' 설립을 외쳤다.
교회와 권력자의 부패를 비판하며, 깨끗하고 정직한 삶을 주장하는 그의 설교는 하층민을 시작으로 점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급기야 자신을 신이 보낸 예언자로 주장하면서 추종자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중에는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로렌초가 죽은 후, 사보나롤라는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피렌체 정부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피렌체를 성경에 입각한 도시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개혁 정책을 편다.
1497년에는 도시 내 모든 사치품(귀금속, 그림, 책 등)을 모아 시뇨리아 광장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일명 '허영의 화형식'이었다. 시민들은 솟구치는 불길을 보며 성가를 불렀고, 큰 소리로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당시 많은 예술 작품들이 불 속에 던져졌고 이 때문에 사보나롤라는 후대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보나롤라에게 감명받은 보티첼리도 자신의 작품을 이 화형식에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친구들이 간신히 말렸다고 한다.
보다 못한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파문했고, 뒤이어 피렌체 도시 전체를 파문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사보나롤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교황청은 사보나롤라를 회유하기 위해 극단적인 설교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추기경 자리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피로 물든 붉은 모자(그리스도의 피의 면류관)를 쓴 순교자'가 되길 원한다며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보다 못한 교황의 명령... '제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