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어른이 되면
"6개월 후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이렇진 않았죠."장혜정씨에게 동생과 단 둘이 보낸 반년이 어땠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장씨는 연말이면 '서울 거주 6개월'이란 자격을 충족한 동생이 주간보호시설 이용이나 활동지원서비스 등의 제도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활동지원서비스 매칭 기관 세 곳에 연락을 돌렸는데, 딱 한 곳에서 답이 왔습니다. 그래도 활동보조인으로 지원하신 분과 인터뷰까지 훈훈하게 잘 마쳤어요. 하지만 서비스 시작 이틀을 남기고 중개 기관에서 '못하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어요."장씨는 "정확히 어떤 이유 때문에 서비스 취소 통보를 받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동생과의 자립 생활을 다룬 <어른이 되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데, 여기에 활동보조인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설명한 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물론 '다큐 촬영'이라는 건 특별한 변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국가가 마련한 복지 제도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는 장애 당사자들이 있다는 게 장씨의 설명이다. 활동보조인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경증 장애인이나 서비스 지역이 가까운 곳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장씨는 현재의 활동지원서비스가 "하도급 체계 같다"고 지적했다. 국가의 역할은 장애 당사자에게 어느 정도의 활동지원 시간이 필요한지 책정하는 데서 끝나버리고, 이후 과정에서의 책임은 전부 수급 당사자와 매칭 기관에게 떠넘겨진다는 것. 장씨는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크게 좌절스럽지는 않다"면서도 "국가의 '셀프' 복지 서비스와 제도에 있어선 여전히 벽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다큐 촬영을 모두 마무리한 내년 1월, 두 자매는 활동지원서비스에 다시 도전할 생각이다. 혜영씨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한동안 동생과 함께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봐야 한다"며 "지금은 계획을 세우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어찌 보면 막막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장씨는 "그래도 '진짜 최악의 경우'는 면했다"고 덧붙였다.
"혜정이 시설로 돌아가고 싶어 하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하지만 동생의 입장에서 자립한 이후의 생활을 평가한다면, 훨씬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된 거 같아요. 제도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는 변화가 더디고, 이제 걸음마를 떼는 수준이지만요. 혜정이라는 개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모양을 보면 확실히 긍정적인 측면이 많아요.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감정에 무척 솔직해졌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 정도로 자기 표현도 명확히 하죠. 아침에 일어나면 좋아하는 커피 원두를 갈아놓고 저를 깨우기도 합니다. 자아가 진전하고 있어요."훈육과 순응이 전부였던 시설을 떠난 후, 혜정씨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솔직해졌다. 이젠 여럿이 밥을 먹어도 혜영씨 옆자리를 고수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곁에 부른다. 또 '스티커 사진 찍기'라는 취미도 생겼다. 요즘엔 폴라로이드 카메라 촬영에 푹 빠져있기도 하다. 혜영씨는 자매라고 해도 그간 알 수 없었던 혜정씨의 새로운 성격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6개월의 동거는 서로 떨어져 살던 10여 년의 경험을 금세 뛰어넘었다.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여름보단 더 잘 알게 된 거 같아요. 짜증도 많고, 감정도 풍부하고, 주목받는 거 좋아하고. (웃음)"기꺼이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