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차크라 행사장에서 오랜 시간 명상을 했다. 멀리서 남인도 청년 쌍케가 찍어준 사진이다.
송성영
오늘도 칼라차크라 행사장에서 카랑카랑 기운이 넘치면서도 부드러운 달라이라마 존자의 법문이 있었다. 법문을 듣기 위해 빈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어느 서양인이 자기 자리라며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비켜 주세요. 여긴 우리 그룹이 맡아 놓은 자리입니다."옆으로 조금 비켜 앉았더니 주변 전체가 자신의 일행들이 미리 점찍어 놓은 자리라고 한다. 화장실이라도 간 모양이다 싶어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하지만 저들이 점찍어 놓은 공간은 달라이라마 존자가 등장하고 법문을 이어나갈 때까지도 비어 있었다. 10만 명이 모여 있는 이 너른 공간에 자신들의 자리를 점찍어 놓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뜨거운 땡볕으로 밀려난 나는 점점 속이 뒤틀려가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은 몇몇이 자신들만 땡볕을 피해보겠다고 큰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자리라고 미리 점찍어 놓고도 법문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 뒷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뭔 심보로 자비심을 강조하고 있는 이 신성한 칼라차크라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비심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한국말로 동시통역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그러니까... 그래서... 그리하여...'를 수없이 반복하며 법문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달라이라마 존자의 법문은 이런 나의 집착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여러 말씀 중에 몇 가지를 요약해 보면
"오감에 집착하면 불행이 생긴다. 집착하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존재하고 분별심이 생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다보니 고통이 뒤따른다. 나는 본래 없다. 무아를 알게 되면 그 분별심을 없앨 수 있다.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 대자비심이다."달라이라마 존자의 법문이 끝나자 티베트 승려들이 온몸을 악기 삼아 만트라(힌두교와 불교에서 신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다고 생각되는 신성한 말이나·단어·음절)를 굵직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뿜어낸다. 달라이라마 존자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행사장을 빠져나가고 있지만 대부분은 제 자리에 남아 그 만트라송을 명상음악 삼아 마음을 모았다.
10만 명에 이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명상은 혼자와는 달리 집중력이 훨씬 더 강해지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최소한 명상에 잠겨 있는 시간만큼은 달라이라마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가며 모두가 자비심을 품고자 할 것이다. 그 자비로운 기운들이 만트라송과 함께 온몸으로 휘감아왔다.
사람의 몸을 소우주라고 한다면 그 몸통에서 나오는 만트라송은 우주의 소리라 할 수 있다. 그 어떤 알 수 없는 우주의 기운처럼 다가오는 만트라송, 음악에 몸을 떠맡겨 춤을 추듯 만트라 송에 의식을 자유롭게 실려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존재감이 가벼워졌다. 조금 전 동시통역을 해준 여성에게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투덜댔던 어리석은 내 모습이 보였다. 화내고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존재감이 점점 우주의 작은 티끌이 되어 갔다. 그렇게 나는 저만치에 앉아 있던 남인도 청년 쌍케가 내 옆에 다가올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쌍케와 함께 행사장 밖으로 나오는 두 발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군중들에 떠밀려 나갔다. 천천히 여유 있게 빠져나갈 수도 있는데 좀 더 빨리 나가겠다고 뒤에서 밀어 붙였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며 "릴렉스, 릴렉스, 천천히, 천천히 나갑시다,"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앞 사람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천천히 나가려 했는데 뒤에서 밀치는 바람에 앞으로 꼬꾸라질 뻔했다. 화가 났다.
밀리면 밀리는 대로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으면 되는데 사람들이 서두르고 있다는 분별심으로 분심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들의 자리라는 집착과 분별심으로 내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서양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행사장을 빠져 나와 마음을 가라앉히며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반갑습니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되네요." 파드마 삼바바의 수행터, 리왈샤에서 만났던 러시안 미술학도였다. 그녀는 티베트 소년 승려의 초상화를 그렸다. 티베트 소년 승려는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소년 승려에게 짝사랑의 가슴앓이를 남겨 놓고 나보다 며칠 앞서 리왈샤를 떠나 앞서 라다크에 와 있었던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행사장에서 봤습니다. 당신이 아주 오랫동안 평화롭게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을요."그녀가 말한 평화라는 단어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게 평화라는 말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다름없었다. 만트라송에 의식을 떠맡겨 3시간 가까이 명상을 하면서 깃들었던 평화로운 마음자리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나오는 순간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달라이마라 존자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경전을 몇 가지나 공부했는지 매일 몇 시간이나 명상했는지 용맹정진은 몇 번이나 했는지 흔히 말들 하지요. 그렇지만 하루에 몇 번이나 십계를 어겼는지 세어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열 가지 악업(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이간질. 나쁜 말. 꾸며대는 말. 탐욕 성냄. 어리석은 소견)을 하지 않는다는 기본을 지켜 내는 마음의 힘이 없다면 높은 수행이나 방편이 어떤 결실을 거두리라는 희망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달라이라마의 깨달음으로 가는 길 중에서달라이라마 법문은 정확히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열 가지의 악업에서 몇 가지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자리는 내가 살아오면서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악업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사냥과 낚시를 즐기며 수없이 살생을 했고 욕정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음한 마음을 품었고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또한 나쁜 말을 서슴지 않게 내뱉었고 글을 통해 나를 근사하게 내세우기 위해 말을 꾸며댔다. 탐욕과 어리석은 소견 그리고 성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 이상 이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노라 다짐을 놓고 있지만 살아오면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악행들을 꽁꽁 숨겨 놓고 있을 뿐이다. 하여 그 악습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교회나 사원에서 하루의 죄를 뉘우치고 다음날 죄를 짓는 자들을 비난하면서 나 또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라이라마 존자의 말대로 이 악습은 자비심으로 씻어내야 한다. 머리로만 참회나 회개를 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악업이 아닌 것이다.
"숙소로 돌아가십니까?"행사장으로 들어설 때 몇 마디 대화를 나눴던 동물보호 단체 관계자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말을 건넸다. 살아오면서 수없는 살생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건네고 걸음을 재촉해 도망치듯 칼라차크라 거리를 빠져나왔다. 모든 동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동물들에게 자비심을 품을 수 있다. 자비심 없는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이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돌카가 칼라차크라 행사장에서 만났다는 한 서양 여성과 함께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에릭카. 자그마한 키에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그녀는 스물일곱,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다니고 있다 한다.
그녀는 쌍케처럼 칼라차크라 행사장에서 소개하는 무료 민박집을 찾아 나섰고 그곳이 돌카네 집이었던 것이다. 쌍케와 나는 함께 손님방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에릭카는 여성이었기에 혼숙을 할 수는 없었다. 하여 돌카가 엄마와 함께 거실 겸 주방에서 지내기로 하고 에릭카에게 자신의 방을 내주기로 했다.
"불편하지 않겠어요?""전혀요, 손님이 오면 좋지요."모녀의 환한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