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를 옥죄는 그 말들.
PIXABAY
우선 한국의 강간 신고율 자체가 낮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보고서 <2013년 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성희롱부터 강간에 이르기까지 6가지 유형의 성폭력을 겪은 사람들 중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비율은 1.1%에 불과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신고율이 높은 '심한 성추행'이 5.3% ('가벼운 성추행'은 없다), 강간 및 강간미수의가 고작 6.6%였다. 생존자들이 신고를 하지 않은 주된 이유는 '신고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증거가 없어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등이었다. 성범죄에 대한 공권력의 적극적 개입과 섬세한 배려, 신고 권하는 사회적 캠페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 그렇다면 허위 강간의 신고율은 어떨까? 한국에서 이와 관련한 통계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성폭행의 경우 신고율 자체가 낮은 만큼 허위 신고도 드물 수밖에 없다. 이는 세계적으로 비슷한 추세를 보이는데,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허위 신고를 전체 강간 신고율의 2~4%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결국 성범죄 생존자에게 '꽃뱀' 운운하는 것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보험사기' 이야기를 꺼내거나, 응급실 환자에게 '꾀병 아니냐'고 묻는 것보다 몰상식한 짓이 된다. 통계적으로 강간을 허위로 신고할 확률은 고의로 사고를 유발할 확률의 절반 이하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꽃뱀' 운운하는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당사자가 상사의 술자리에 따라갔다거나, 카톡을 주고 받았다거나, 사건 후 뒤늦게 문제 제기를 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이들은 한국에 살면서도 사회적 위계의 억압을 경험하지 못한 희귀한 존재들일까, 아니면 그저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일까? <여혐민국> 저자 주한나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답답함을 토로했다.
"거절해야 했다 하는 남자분들께는. 야근시키는 상사한테 곧바로 따지시죠? 술자리 늘 거절하시고요? 그런데 성매매도 어쩔 수 없이 분위기 맞춰야 해서 같이 해야 한다는 사람도 많던데, 그것도 따박따박 대드셨죠? 임금 체불이면 바로 그날 문자 넣으시고 노동청에 고발하시고요? 초과 수당 안 들어와도 곧바로 인사팀장 카톡 메시지로 따지시겠죠? "자신은 성매매 같이 가자는 것도 거절 못하고, 야근 시키는 것도 거절 못하면서, 술 같이 먹자고 윗사람이 불러서 따라갔다는 여직원은 왜 욕하나요. 교육 담당이었던 하늘같은 선배가, 나쁜짓한 놈 처벌 도와준 사람이 이번에도 술자리에서 지켜줄 거라 믿은 건 왜 욕하는지? 왜 곧바로 고발 안 했냐고, 왜 카톡에 답했냐고 몰아세울까요."발언에 책임지지 않는 '꽃뱀론자'지난 6월, '호식이두마리치킨' 전 회장의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 시민이 나서서 현명하게 대처한 탓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가해자가 여직원을 호텔로 끌고갈 때, 그는 마치 피해자를 아는 사람인 듯 다가가 말을 걸며 구출해 낸 것이다.
포상을 해도 모자랄 이 시민에게, 인터넷에 똬리를 뜬 '꽃뱀론자'들은 가혹하고 몰상식한 발언으로 도배를 했다. 기막히게도, 이들은 도움을 준 시민과 생존자를 '꽃뱀 사기단'으로 몰았다. 이들은 감시카메라에 잡힌 짧은 동영상을 '증거' 삼아, 자신들의 어두운 상상력을 토대로 소설을 썼다. 성폭력을 당하고 있던 사람에게 손길을 내민 시민을 도리어 희롱의 대상을 삼은 것이다.
그 억울한 시민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법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경찰에 제출하기 위해 악성 댓글을 추렸다. 이것이 A4용지로 100장 분량이나 됐다. 하지만 경찰은 고소장을 받아주지 않았다. 누리꾼들이 당사자를 특정하지 않고 '저 여자들'이라는 포괄적 표현을 썼기 때문에 명예훼손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경찰은 '꽃뱀 사기단'이 복수의 지칭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법적 조치는 둘째 치더라도, 선행을 하고도 조롱과 비난을 받는 사회에서 누가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하겠는가. 이렇듯 '꽃뱀론자'들의 언어폭력은 성폭력 생존자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침묵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은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뒤에도 반성하기는커녕, 새로운 대상을 물색하기 바쁠 뿐이다. 불행히도, 이런 환경에서 한국에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 이른바 '갑질 성폭력' 비율은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는 2012년 341건에서 2014년 449건, 2016년 545건으로 증가해 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직장 내 성폭력이 늘고 있을 뿐 아니라, '2차 가해'의 괴롭힘까지도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2017년 7월에 발표한 조사를 보면, 성폭력을 당한 뒤 파면이나 해고 등 신분상 불이익을 당하거나, 따돌림, 폭행, 폭언, '꽃뱀' 꼬리표 등 정신적 학대를 겪은 비율이 절반이 넘는 57%였다. 그로 인해 10명 중 7명이 회사를 그만 두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성폭력 뿐 아니라, 2차 가해까지 철저히 책임을 묻고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2차 가해'는 직장 내부만의 문제가 아님을 최근의 여러 사건들이 보여주었다. 인터넷에서 '갑질'을 검색하면 짙은 사회적 분노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직장 성폭력 사건에는 '꽃뱀' 딱지가 붙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갑질'은 손가락질하면서도, '갑질 성범죄'는 싸고도는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에서 유독 느리게 가는 시계"여성이 남자와 술을 함께 마시거나, 함께 밤길을 걷거나, 심지어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그녀가 바닥에 눕혀져 성폭행을 당하고 싶다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강간은 언제 시작되는가" <타임>, 1991. 6. 3.1991년, 즉 지난 세기에 <타임> 편집장이 말한 이 상식은 한국에서는 21세기에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헬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성관념도 조선 시대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앞에서 '꽃뱀 신화'의 허구성을 통계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생각을 바꾸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해한다. 본래 고정관념은 이성에 속한 것이 아니니, 합리적 설명이 언제나 통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꽃뱀이 두려운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비난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 그래도 희귀한 꽃뱀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는 획기적 대책이다.
2015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통과된 '명시적 동의(affirmative agreement)' 법안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어려운 말인 것 같지만, 아주 간단한 내용이다. 강간 여부를 판단할 때 '거부했는가'가 아니라 '합의했는가'를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