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박수소리> 중에서. TV를 보는 이길보라 감독의 엄마 길경희씨.
<반짝이는 박수소리> 스틸컷
'내 방식'을 택했기 때문일까. 영화학교 합격 통지문이 날아왔다. 그렇게 지난 9월부터 2년간의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이길보라 감독은 네덜란드 영화학교에서 단순히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영화 예술을 가지고 자신만의 연구를 진행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 학기는 자기만의 '주관성'을 찾는 과정이란다. 같이 공부하는 10명의 동기들도 가지각색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길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지금 "다양한 이 문화들의 레이어(층위) 속에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한두 달 정도는 매일 매일 깜짝 놀랐던 것 같아요. 국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다문화가 있어요. 국적은 더치(네덜란드)지만 이스라엘에서 왔고 이스라엘에서 산만큼 암스테르담에서 산 친구, 더치와 결혼해서 네덜란드에서 아이를 낳고 이혼했지만 여전히 같이 아이를 키우며 사는 러시아 친구, 18살 때까지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라 살다가 최근 10년간을 뉴욕과 LA에서 산, 유고슬라비아인처럼 생겼지만 더치에서 나고 자란 친구. 정말 다양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저는 명함도 못 내미는 거예요. '부모님이 농인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저는 수어를 썼는데, 세상 사람들은 음성언어를 써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라는 문장이 여기서는 별로 신기하거나 이상하거나 특별한 문장이 되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항상 그런 차이들을 발견하고 주목하면서 즐거워했고, 제 작업에 반영했어요. 근데 이곳에선 그게 통하지 않는 거죠." 한국에서 낯선 것들이 암스테르담에선 익숙했다. 익숙하기에 부러 강조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일상적 고민들이 무용한 건 아닐까, 불안했다. '아, 그럼 나는 여기서 무슨 작업을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고민을 꾹꾹 눌러담아 스승에게 메일을 보냈다. "네게 오는 것을 그냥 온전히 보고 받아들이는 데 힘을 쓰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웃풋'에 연연하지 않으려 마음을 고쳐먹었다. "맛있는 것 챙겨먹고, 해 뜨면 공원하고, 주변 산책하고, 소도시도 여행하고, 일기도 많이 쓰는" 느슨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자의 자녀로서 살아남기 위해선 예쁜 아이,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 돼야 했어요. 과거에 그걸 택한 적도 있고요. 그런데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꼭 그렇게만 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꼭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가끔 '열심히 살아야 한다'와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가 충돌해서 괴롭기도 하지만, 요즘은 '지금 이 순간 지구에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덜 끼치고 행복하게,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가 목표예요."물론 마음의 여유만 찾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당장 학비부터 골칫거리다. 학교 추천으로 정부 장학금을 받게 되어 1년치 학비를 벌고,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 International)에서 주는 지원금 3천 달러를 받았지만 이후부터가 걱정이다.
당장 내년부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만약 그 어떤 장학금도 받지 못하면 고스란히 자비를 털어 학교를 다녀야 한다. 비EU국가 유학생은 EU국가 유학생에 비해 3배 많은 등록금을 내는 게 규정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받는 장학금은 폭이 좁을뿐더러, 예술 분야 전공생들을 대상으로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길 감독은 유학길에 오르며 SNS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제목은 '이길보라의 유학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장학금'. 리워드는 '없음'. 다만, '사회에 좋은 영화와 글로 환원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찌 보면 배짱 좋다는 비아냥이 돌아올 수도 있는 시도였다. 실제 욕도 많이 먹었단다. '거지냐', '창피하다', '구걸하냐'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조금씩 더 많아져야 한다는 운동적 차원이었어요. 예술 분야에 왜 장학금을 안 주지? 다큐/예술 영화 공부하겠다는데 그게 왜 작가/감독 자기만을 위한 거지? 왜 예술 분야에 장기적 육성/후원 계획이 없지? 그럼 그냥 다 포기해야 하나? 왜지? 그럼 다른 방식으로 그곳에서 공부해보자.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늘어나면, 또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느슨한 삶, 제 작업에 또 다른 영향을 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