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11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당시 정의화 부의장이 한미FTA 비준안 통과를 선언하자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이 의장석을 에워싼 채 항의하며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남소연
정당들이 국회의장의 선출에 욕심을 내는 이유는 국회의장의 부차적 권한이지만 현실에서는 막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직권상정권에 있다. 국회에서는 종종 법안이나 예산안, 인명동의안 등의 처리를 놓고 정당 간 치열한 대립이 발생하고는 한다. 이러한 대립이 지나쳐 국회가 운영되지 못할 지경이 되면 국회의장이 해당 안건을 직권으로 상정해 난맥을 풀고는 한다.
하지만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은 정쟁(政爭)으로 꽉 막힌 국회를 뚫어주는 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날치기 법안 통과와 같이 다수당의 횡포로 이어질 우려도 크다. 여야 간 의견이 극한으로 대립되던 중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후 여당의 밀어붙이기 표결이 이루어지면서 큰 혼란을 불러온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안과 2009년 미디어법 날치기 사건이 대표적이다. 한미FTA 국회 비준안은 의원들 간 폭력사태로까지 비화되기까지 했다.
다수당의 날치기 통과 등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 문제되자 새누리당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제한하는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의 도입을 추진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공약으로 내세워 152석으로 과반을 넘는 의석을 얻었다. 이어 국회선진화법은 2012년 5월 2일 통과되고 18일 후인 30일 시행되었다.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엄격히 제한했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은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각 교섭단체대표의원 간 합의가 된 경우로만 한정되었다('국회법' 제85조). 사실상 교섭단체 간 합의 없이는 직권상정이 불가능해졌다.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제한 외에도 안건조정제, 안건신속처리제 그리고 필리버스터(합의적 의사진행 방해)가 포함되었다.
직권상정이 불러온 국회의 마비그런데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되었던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 다시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시에 국회선진화 법으로 함께 도입되었던 필리버스터제가 발동되었다. 2016년 정부와 여당은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에 대한 수정안(테러방지법)'을 도입하겠다고 나섰다.
테러방지법은 국가정보원에 정보수집 및 추적권을 부여하고 테러인물을 감시·관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담고 있었다. 야당은 즉각 국정원의 권한이 과도하게 커져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며 테러방지법을 거부하고 나섰다.
국회는 테러방지법을 둘러싼 여당과 야당의 대립으로 마비되었다.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야당으로부터 테러방지법에 대한 합의를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자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구했다.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정의화는 새누리당 출신이었음에도 새누리당의 직권상정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새누리당 대표였던 김무성 의원과의 대립양상까지 보인 끝에 결국 테러방지법은 직권상정되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북한의 제4차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그리고 국제테러조직인 IS의 활동을 근거로 당시를 국가비상사태라 규정했다. 국가비상사태이기 때문에 국회선진화법 상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야당은 필리버스터로 대응했고 필리버스터는 38명의 의원들에 의해 무려 192시간 27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끝내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도발이 대한민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북한의 군사적 행동이 국가비상사태 판단의 근거가 된다면 대한민국은 상시적 비상사태에 빠져야 한다. IS의 테러활동은 중동의 지도를 바꿔놓을 정도로 큰 혼란과 인적·물적 피해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IS에 의한 테러가 발생한 바는 없다. 게다가 국제테러단체의 활동 역시 언제나 존재해왔다. IS의 테러활동 역시 국가비상사태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판단에 따른다면 대한민국은 언제나 국가비상사태 중이어야 하고 국회의장은 언제든지 직권상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국회선진화법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국회의장은 국회를 대표하는 삼부요인이다. 국회의장은 갈등이 발생하면 중재하고 화해를 유도해 국회를 안정화 시킬 의무가 있다. 때문에 자칫 더욱 큰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직권상정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2017년 2월 정세균 국회의장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특검법 연장안에 대한 민주당 등 야당의 직권상정 요청을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라며 거절했다.
당시는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전국이 발칵 뒤집혔던 시점으로 직권상정의 명분은 오히려 테러방지법 때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과 정세균 국회의장의 특검연장안을 단순비교할 수는 없지만 국회를 대표하는 자로서 국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에 대해서는 정세균 국회의장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당들이 자당 출신 국회의장을 배출하고자 경쟁하는 것을 오롯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권한 때문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야간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나가려 하지는 않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만 바라보는 것을 보면 국회의장 배출에 열을 올리는 정당들의 행태가 곱게 보이지는 않는다. 국가 의전서열 2위인 국회의장을 여야 정쟁의 수단으로 타락시키는 안타까운 일들이 다시는 벌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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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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