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령산전망대에서 붓장난書不盡言 言不盡意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표현할 수 없고, 아무리 말을 잘하여도 뜻하는 바를 다 나타낼 수 없다
이명수
사회 속에 존재하는 문명인이라면 말과 글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말과 글은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표현 방법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세상과의 소통이 시작된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라디오 등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고, 가정과 직장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된다.
이 세상의 무슨 일이든 말하기는 쉽다. 말로써 못할 일은 없다. 당장 하늘의 별도 몇 개쯤 뚝 따올 수도 있고, 말로써 소고깃국을 끓이면 대한민국 사람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을 정도로 풍족하다. 말은 뱉었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아, 미안! 말이 헛나왔네"라며 실수를 인정하거나 뒤집으면 된다. 상대방도 걸러서 듣는 경우도 많으므로 어지간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평소에는 잘 걸러서 듣던 사람도 어떨 때는 확대해석하고 오해하기도 한다. 인간의 특성이 원래 그렇다. 마음이란 것이 한결같지 않다. 마음이 넓을 때는 우주를 다 감싸고도 남지만 좁을 때는 바늘 하나도 꽂을 틈도 없다. 그래서 웃자고 농담으로 한 말끝에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기도 한다.
갈등은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내가 한 말을 상대방이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부부간의 문제도 실은 아주 사소한 말다툼에서 비롯된다.
소통의 핵심은 오해를 줄이고 이해를 넓히는 것이다. 오해가 쉽게 일어나는 이유는 듣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 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선입견이 새로 들어오는 정보의 순수한 입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진다.
무엇을 눈으로 보면서 내부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외부의 정보는 일단 우리의 감각수용기라는 감각세포를 자극하고 신경계를 따라 뇌에 정보를 전달한다. 뇌에 전달된 정보는 그대로 해석되지 않고 과거의 경험, 지식, 마음의 상태 등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똑같은 현상을 보고도 사람마다 해석이 다른 이유다.
말은 글에 비교하면 훨씬 즉흥적이다. 순간적인 생각이 정제되지 않고서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다. 총알처럼 발사된 말은 그 즉시 상대방의 마음과 감정을 자극한다. 단어는 한 가지 뜻만 가진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뜻을 가진 단어가 많고, 같은 단어라도 듣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어느 해 봄날, 가족과 함께 여의도 윤중로로 벚꽃 구경을 갔었다. 벚꽃은 필 때도 산뜻하고 아름답지만 질 때도 참 아름답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 사꾸라꽃이 만발했구나!"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벚꽃'과 '사꾸라', 똑같은 꽃이지만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느낌이 확연히 달라진다. 꽃은 꽃일 뿐인데도 일제강점기 시절의 여러 안 좋은 기억과 결부되어 이런저런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또한, 말하는 사람의 억양이나 표정, 매너 등에 따라서도 말의 느낌이 달라진다. 좋은 말도 이죽거리면서 하면 뜻이 반대로 해석된다. 말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다. 무신경하거나 부주의한 말에 감정이 상한 상대방이 거친 소리로 되받아치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지기에 십상이다. 말다툼하다가 주먹다짐으로 번지고, 치고받고 싸우다가 이성이 마비되면 무서운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고금동서의 깨우친 사람들이라면 저마다 말이 어렵다고 강조한 것이리라.
일제강점기 시절 시인 정지용과 쌍벽을 이루던 당대의 문장가 이태준의 산문집 『무서록(無序錄)』에 '십분심사 일분어(十分心思一分語)'란 구절이 나온다. '마음이 품은 뜻은 많으나 말로는 그 10분의 1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렇듯 다 말 못 하는 사정은 남녀 간 정한사(情恨事)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표현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느껴진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뜻을 세울 수가 없고, 말을 붙일 수가 없어 꼼짝 못 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나는 이 말에 십분 공감한다. 나 역시 마음에 맴도는 생각은 많으나 말로 표현하는 것을 조심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따금 기분 좋게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발동이 걸리면 장광설을 늘어놓기도 하는데, 많은 말을 쏟아낸 후에는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할 때가 많다.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 즉 천륜(天倫)은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자기 생각을 갖고부터는 사람을 가려서 사귀게 된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이다. 훌륭한 스승이나 모범적인 친구를 만나면 그 행실을 보고 배움으로써 자연스럽게 스승이나 친구를 닮게 되고, 나쁜 친구와 어울리면 자신도 모르게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좋은 인연은 큰 힘이 되고 삶을 윤택하게 한다.
그런데 세상사 중에서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표리부동한 사람도 많고, 뚝배기보다 장맛이 썩 좋은 사람도 많다. 선량한 얼굴로 웃으면서 표독스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속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생겼겠는가!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 때문에 사람을 옳게 판단하는 것은 늘 중요한 일이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어 왔다. 풍채와 얼굴 모습, 말하는 태도와 말의 조리, 필체와 문장력, 그리고 판단력이다.
외형이 가장 잘 드러나고 보기 쉬우므로 생긴 것부터 보고, 다음으로 말을 살핀다. 말을 어느 정도 나눠보면 상대방의 지식 수준이나 사람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진지하게 들으면 상대방이 하는 말의 진실과 거짓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상대방의 말이 지나칠 정도로 매혹적이고 달콤할 때는 애써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사자성어를 생각한다.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나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줄 좋은 일이나 정보로 마음을 혹하게 하는 말을 들을 때는,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롭게 하려는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좋은 일이라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취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익을 남에게 그냥 나눠줄 까닭은 없다.
뜻이 허황하거나 지나치게 떠벌리는 말이 실속 있는 경우는 드물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쓰는 어휘 자체가 다르다. 말투가 상스러우면 그 마음 또한 천박한 경우가 많다. 선량한 사람이 무뚝뚝할 수는 있어도 상스럽고 저속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의 마음이 선량한 경우는 드물다.
말은 힘을 가지고 있다. 좋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격려의 말을 들으면 힘이 난다. 욕설이나 거친 말을 들으면 화가 나는 것도 말의 힘 때문이다. 무슨 말이든 여러 사람이 어떤 단어를 되풀이 사용하게 되면 그 말이 진언(眞言) 또는 주술이 되고, 그 말대로 이뤄진다고 믿는 것이 언령(言靈) 사상이다. 우리가 설날 행한 덕담도 역시 이런 언령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언어와 부딪힌다. 대개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세 치 혀가 원인이 되는 예가 많다. 한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한마디 말이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상처를 준 사람은 금방 잊는 말을 상처를 받은 사람은 결코 잊지 못한다. 상대방에게 상처 주기에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기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러므로 항상 말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침묵이 금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글은 말과 비교하면 훨씬 사색적이다. 물론 문맥이 전혀 안 맞는 글도 많지만, 그런 수준 떨어지는 문장이라도 글로 적을 때는 몇 번씩 생각하기 마련이다. 좋은 글은 생각이 정리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좀 더 명확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쓰려면 많은 사유와 공부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같은 현상을 놓고도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지식이 짧아 설익은 생각, 잘못된 내용을 진리로 알고 쓰는 경우도 있다.
젊은 시절에 나는, 정말 가소롭게도, 한 달 만에 책 한 권을 쓴 적도 있다. 원고를 쓰는 동안 밤잠을 설치며 내 나름대로는 코피까지 쏟아내며 쓴 작품들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책을 찍어내는 데 필요한 종이를 만드느라 희생된 나무와 잉크에 미안해지는 함량 미달의 글들이 태반인 것 같다.
내 이름으로 펴낸 여러 권의 저서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을 만난 후이다. 까맣게 오래전 우연히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 몇 잔을 함께 마셨는데, 그녀의 치열한 창작 정신이 죽비처럼 나를 후려쳤다. 그녀의 대하소설 『혼불』 초판 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놓은 자료만 어지럽게 쌓아둔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 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었다."최명희 선생은 장장 16년 동안 『혼불』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여 한 자 한 자 새기며 이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무한한 공을 들였기에 언어의 조탁이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는다. 글쓰기의 고통이 얼마나 힘겨운지 절절히 묻어나는 대목은 작가 후기에도 나온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최명희 선생을 만난 후부터 글을 쓴다는 것이 힘들어졌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원고를 찢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따금 원고 청탁이 들어와도 거절했다. 잡문 한 편을 쓰더라도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수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사유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생겼다.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는 최명희 선생의 말씀처럼, 가능한 천필만필 다듬으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는 데도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재능과 노력이 부족한 탓이다.
출판 편집자의 중요 업무 중 하나는 원고 검토이다. 책으로 펴내기를 희망하는 원고들이 출판사에 들어온다. 나는 편집자이기에 이전에 작가이기 때문에 글 쓰는 것의 어려움을 잘 안다. 투고 원고를 검토할 때면, 새벽녘에 홀로 깨어 원고를 쓰고 있는 나를 생각한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작가는 세상을 향해 연애편지를 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제발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심정으로 적당한 단어를 찾아내어 씨줄과 날줄을 엮는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쓰지만, 세상 사람들이 재미가 없다고,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차갑게 외면할 때 작가의 노력은 허무한 물거품이 된다.
책 한 권을 쓰는 글쓴이의 노력에 비하여 소득이 형편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각고의 노력으로 몇 년 동안 쓴 글이 책으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글을 쓰는 사람들, 작가들의 마음과 처지를 잘 알기에 투고 원고를 유심히 살핀다. 그것이 많은 시간 인내와 고통을 쏟아부어 원고를 쓴 작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장의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원고도 상당히 많다. 도무지 책으로 펴낼 가치가 없는 원고를 읽노라면 쓴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오르기도 한다. 책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닌데, 깜냥이 안 되는 이들까지 책을 펴내는 현실이고 보니 책의 가치가 많이 추락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