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교의 모습.
연합뉴스
친구들은 그의 한국사 실력이 아깝다고 입을 모았다. 단지 한국사 영역의 성적만 가지고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은 없다는 걸 에둘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도 그걸 모르진 않는지, 명색이 인문계 고등학교인데도 상담 중에 그의 입에서 대학 진학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언뜻 일찌감치 대학 진학의 꿈을 접었나 싶을 정도다.
현재 전국에 4년제 대학 수만도 200개가 넘고, 입시전형 또한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힘들 만큼 다양하지만, '역사 오타쿠'인 그를 기꺼이 품고 꿈을 키워줄 대학은 사실상 없다. 수년 간 진학업무를 담당해온 한 동료교사는 영어나 수학이 1등급이라며 모를까, 한국사 성적만 가지고는 서울은커녕 지방의 어느 대학 한 군데 기웃거릴 수조차 없다고 잘라 말했다.
주지하다시피 학령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인해 최근 고등학교 졸업생 수보다 대학의 입학 정원이 많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겐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시쳇말로 '성적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지방의 외진 소규모 대학이야 어찌어찌 해서 갈 순 있겠지만 사학과가 없고, 역사와 관련된 학과가 개설된 대학엔 그의 성적으로는 언감생심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담임으로서 만난 이런 '오타쿠'들이 적지 않았다. 10여 년 전 내게 엑셀 프로그램을 가르쳐주고 수업자료로 쓸 동영상을 능숙하게 편집해 준, 별명이 '컴퓨터 도사'였던 아이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세계의 여러 나라와 수도 이름과 산의 높이, 면적과 인구, 심지어 1인당 GDP까지 줄줄 외는 '움직이는 지리부도'도 있었다.
요즘에도 드물지 않다. 우리 반만 해도, 축구를 좋아해 전 세계 축구팀과 선수의 이력을 줄줄 꿰고 있는 아이도 있고, 교과서든, 공책이든 여백만 있으면 만화 캐릭터를 멋들어지게 그리는 친구도 있다. 또, 취미로 시작한 작곡에 눈을 떠 축제 때마다 무대에 올라 발군의 기량을 뽐내는 아이도 있다. 영재의 재능이 그다지 특이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에게 대학의 문은 한없이 좁다는 데에 있다. 그런 다양한 재능들은 나중 개개인의 삶에 활력소가 될지언정 이른바 대학수학능력을 측정하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당장 대학입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되레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로부터 "그런 것 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거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뻘짓한다"며 핀잔을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국·영·수 못하면 발군의 실력 있어도 모든 게 허사요즘 대세라는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을 두고 처음엔 이런 아이들을 위해 만든 입시제도라고 생각했다. 물론, 착각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국·영·수를 비롯한 교과 성적은 기본이고, 거기에 남다른 스펙을 갖춰야만 도전이라도 해볼 수 있다. 더욱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서는 수능 최저 등급까지 걸어놨으니, 그야말로 팔방미인을 요구하는 '슈퍼맨 전형'이다.
요컨대, 대학수학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인 국·영·수를 못하면 재능이 무엇이든 빛을 볼 수 없다. 거칠게 말해서, 대학입시를 앞둔 아이들에게는 시험공부만이 유일한 재능이다. 나머지는 그저 '대학에 간 뒤에 해도 늦지 않은' 취미나 잡기일 뿐이다. 어떻든 대학을 졸업해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사 1등급'으로 영재는 근근이 힘든 학교생활을 견뎌내고 있지만, 켜켜이 쌓여만 가는 무력감이 시나브로 그의 하나뿐인 재능을 잃게 만들지나 않을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한국사 수업시간 초롱초롱한 그의 눈빛이 바람 앞의 등불인 양 위태롭기만 하다. 학벌구조에 포획된 한국 사회에서 단지 '한국사 1등급'만으로 지금껏 학습된 무력감을 극복해내기란 힘들 것 같다.
영재와 같은 아이들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으며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을 때라야 학교도 사회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런 이야기가 허황된 망상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아이들을 끝 모를 무력감에 몰아넣고 있는 건 아닌지 곱씹어보게 된다. 대학입시를 1년 남짓 앞둔 지금, 담임으로서 격려 말고는 영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6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공유하기
천재적 '한국사 1등급', 그럼 뭐하나 대학 못 가는데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