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기대 1.장준영 2.김희상 3.탁무권 4.김찬 5.이현배 6.최경환
민청련동지회
상근직으로 월급도 받은 집행 간부들 민청련의 대외적인 활동은 집행위 간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침 9시면 어김없이 김근태 의장의 주재로 장영달 부의장, 박우섭 총무부장, 박계동 홍보부장, 홍성엽 재정부장, 연성수 사회부장 등 6명의 집행위원들이 사무실에 모여 아침 조회를 열었다. 퇴근은 저녁 6시였다.
김근태 의장은 온유한 성품이었지만 상근 간부들의 근무 기강을 세우는 데는 엄격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 김근태 의장을 형처럼 따랐지만 한편으로 어려워했다. 장영달 부의장이 때때로 옥중투쟁, 교도관들과 싸운 무용담으로 분위기를 돋웠다.
안기부, 치안본부 등 민청련 담당 기관원들과의 교섭 창구는 박계동이 맡았다. 박우섭은 부지런히 재야운동과 민청련 내부조직을 오가며 일을 기획하고 추진해 나갔다. 홍성엽은 성품대로 언제나 말없이 사무실을 지키면서 온갖 궂은 살림살이를 도맡아 조용히 꾸려나갔다. 연성수는 주로 노동현장 쪽과 연결하며 민중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서 사업 전반에 활력을 주었다.
집행위 간부는 모두 상근직이었다. 민청련은 집행 간부의 상근화를 위해서 최저생계비 수준이지만 고정급여를 지불했다. 급여체계는 간단했다. 연령에 상관없이 월 10만 원을 기본급으로 하고, 기혼자는 10만 원을 추가하고, 자녀가 있을 경우 2명까지 1인당 각 5만 원씩 추가해 최대 20만 원까지 가족 수당을 지급했다.
단, 부인이 돈을 벌 때는 5만 원을 삭감했다. 예를 들면, 기혼에 자녀가 둘이 있으면 30만원을 받았고, 부인이 돈을 벌 경우 25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반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월급이었지만, 이 급여는 집행 간부들이 한눈팔지 않고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것이었다.
이렇게 상근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회원들과 후원자들의 노고가 숨어있었다. 특히 '기대'들의 노력이 컸다. 이들은 매달 회원들이 내는 1만 원씩의 회비를 모아 10-20만 원 정도씩 꼬박꼬박 박우섭 총무에게 전달했다. 박우섭의 회고에 의하면 창립 초기 급여를 포함하여 매월 400~500만 원 정도 운영비가 들었는데, 그 중 대략 1/3은 회비, 1/3은 후원금, 1/3이 수익사업으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정책 기능을 담당한 상임위원회상임위원회는 원래 집행위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는 사태에 대비해 2진 개념으로 조직했지만, 집행위가 안정을 찾으면서 주로 정책 기능을 담당했다. 초기에는 사무실과 상근자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활발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꾸준히 정기적으로 모임을 유지하면서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모임 장소로는 주로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의 돌베개 출판사 사무실을 이용했다. 최민화 의장, 이해찬 부의장, 이을호 부의장 등 4-5명이 모여 토론하고, 정세분석 등의 문건을 작성했다.
문건 초안 작성은 주로 이을호가 맡았다. 이을호는 당시 출판사에 간부직원으로 근무하면서도 저녁 시간을 거의 전적으로 상임위 활동에 투여하다시피 했다. 1984년부터는 독자적인 사무실을 마련하고 상근 인력도 충원하면서 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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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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