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처럼 칸칸이 들어서 있는 라다크 레의 빈민 가옥.
송성영
고통스럽게 흙벽돌을 등에 지고 계단을 올라서는 저들에게 왕궁이며 사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들의 사진을 찍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글쟁이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겁 많은 좀도둑처럼 몰래 몰래 몇 장의 사진을 담고 나서 사원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언덕길을 내려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네모반듯한 흙벽돌 건물이 길게 이어져 있는 빈민들의 거주지를 만났다. 축사처럼 칸을 질러 겨우 조악한 문짝 하나만 매달고 있었다. 저기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악해 보였다. 주변에 흙벽돌이 아무렇게나 쌓여져 있는 것을 보면 흙벽돌을 찍어내는 노동자들이나 조금 전 왕궁에서 흙벽돌을 나르는 일용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일 것이었다.
빈민촌 주변에는 크고 작은 게스트 하우스들이 들어서 있었다. 한 게스트하우스 건물 이층에서 대마초에 취해 낄낄거리고 있는 서양 젊은이들이 보인다. 이 젊은이들의 공허한 웃음에는 칸칸이 내지른 흙벽돌 안에서 힘겹게 생활하는 도시 노동자의 삶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오래된 미래 라다크>라는 책이 대마초에 취해 낄낄거리는 또 다른 관광객들을 몰고 온 것인지도 모른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배낭을 꾸렸다. 그제서 나는 상담소에서 알려준 시골 마을 이름을 떠올렸지만 도무지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숙소 매니저를 찾아가 숙소 앞으로 펼쳐진 멀리 산자락 아래 나무숲이 보이는 마을을 손짓하며 말했다.
"나는 저 시골 마을로 가고 싶습니다. 어디서 버스를 타야 합니까?""지금은 버스가 없을 겁니다. 택시를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내일 아침까지의 숙박비를 지불했으니 서두를 것 없습니다. 하루 더 자고 내일 아침 버스를 타세요."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망설였다. 저 마을에 가서 숙소를 잡지 못하면 낭패였다. 메인 바자르며 흙집 마을과 왕궁을 둘러보면서 몇 시간 내내 걸었기에 무릎 상태도 좋지 않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시골 마을을 둘러본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숙소 침대 위에 배낭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오후 2시, 시간은 충분했다. 시골 마을에 적당한 숙소를 잡아 놓고 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만약 머물만한 곳이 없으면 배낭은 더욱더 나를 압박할 것이었다.
가벼운 천 가방을 어께에 걸치고 버스 터미널 근처로 나왔다. 합승 택시를 잡아 손짓으로 저 멀리 나무숲이 있는 시골 마을로 가고 싶다고 했더니 택시 기사는 걱정 말라며 고개를 까닥거린다. 택시는 묵언승처럼 말이 없는 세 명의 승객을 더 태웠다. 도중에 내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모두가 저 마을로 간단 말인가. 의심스러워 다시 물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시골 마을로 가고 있는 거죠?""No problem!(문제 없어요!)"하지만 택시가 멈춘 곳은 한국으로 말하자면 면 단위 크기의 마을이었다. 거기서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승객 모두가 내렸다. 나는 본래 가고자 했던 나무숲이 보이는 시골 마을의 이름을 알지 못해 함께 내린 티베트 청년에게 여기서 농촌으로 갈수 있냐고 물었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농촌 마을이 나올 것입니다.""택시가 왜 거기 까지 태워주지 않지요?""지금은 길이 막혀 갈수 없습니다."자신이 그 길을 알려 주겠노라며 따라 오라고 했다. 그의 뒤를 따라 골목길을 벗어나 큰 길로 나서자마 내 입이 쩍 벌어졌다. 붉은 승복을 입은 라마승들과 함께 티베트 전통 복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수만 명은 돼 보였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해 한적한 시골 마을로 가겠다고 무리해서 택시까지 잡아탔는데 오히려 택시기사는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엄청난 인파 속으로 나를 데려온 것이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티베트 승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칼라차크라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입니다.""그럼 이곳에서 칼라차크라가 열리고 있단 말입니까?""모르셨습니까? 칼라차크라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이게 도대체 뭔 일이란 말인가. 나는 귀신에게 홀린 듯 현기증과 함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끝없이 몰려오고 있는 수만 명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티베트 불교의 최대 법회, 칼라차크라를 피해 갈 수 없단 말인가. 티베트 불교의 창시자 라 할 수 있는 파드마 삼바바의 수행지 리왈샤에서부터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 했던 것이 아닐까.
본래 20만 명 이상이 몰린다는 칼라차크라 행사로 라다크가 혼잡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라다크를 피해 스피티로 가려 했다. 그러다가 스피티 가는 길이 막혀 우연찮게 히말라야 고지대를 넘고 넘어 라다크까지 왔다. 자본이 깊숙이 침투해 있는 레에서 벗어나 '오래된 미래 라다크'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은 한적한 시골 마을로 가려 했다. 그런데 내 영어를 잘못 이해했는지 택시 기사가 내려준 곳은 엄청난 인파와 함께 칼라차크라 법회가 열리고 있는 초크람사 라는 마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