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안양로, 장영달, 조성우. 1990년대에 활동하던 모습들이다.
민청련동지회
동막 한 과수원에서 다시 모인 20명의 청년들7월 중순, 포도철에 인천 동막에 있는 한 과수원에서 이해찬, 박우섭, 이범영, 연성수, 연성만, 최정순 등 20명쯤 되는 청년들이 다시 모였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공개단체가 출범하면 구속을 각오하고 참여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을 앞장서서 이끌 지도자를 누구로 세울 것인가였다. 손학규(서울대 65학번), 장명국(서울대 66학번), 안양로, 조성우 등 1960년대 학번 중에서 대표급 인물들이 모두 거론되었다. 이때만 해도 김근태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아마도 김근태는 노동현장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일부러 끌어내 세우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5월 말부터 OB모임 물주 역할을 하던 최민화 역시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OB모임에서도 의장 후보를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OB멤버 중에는 안양로, 조성우, 장영달 등이 추천되었다. 안양로는 성격이 두루 원만하고, 선도투쟁파나 현장파에게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본인이 고사를 했다. 일선에서 투쟁한 경험이 적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본인이 내세운 이유였다. 조성우는 본인이 의지는 있는 듯 보였으나(사실 본인은 일본 유학 계획 때문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이 반대했다.
조성우의 경력으로 볼 때 지나치게 선도정치투쟁으로 기울 우려가 있고, 그래서 현장파의 참여를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장영달은 오랜 투옥생활로 운동권 청년들과의 인간관계가 넓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당시 장영달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7년간이나 징역을 살고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다시 구속 1순위 자리에 세운다는 것도 동료들의 마음에 흔쾌하지 않았다.
의장 세우기6월 말쯤 최민화에게 정문화가 중요한 제안을 했다.
"형님이 김근태 선배를 한번 만나 보쇼." 김근태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민화는 이것이 아마도 정문화 부인 천영초(고대 72학번)의 아이디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실무간사를 했던 천영초가 당시 인천산업선교회 실무간사를 하던 김근태의 근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산선의 내부사정이 김근태가 조만간 실무간사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최민화는 무릎을 쳤다.
'그래, 그거야!' 김근태는 서울상대 65학번으로 손학규, 조영래, 신동수와 경기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 데모하러 나갈 때 교실을 지킨 모범생이었던 그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대학 1학년 때 한일회담반대 데모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1967년 6∙8부정선거반대투쟁 때 서울상대 대의원 의장으로 데모를 주도하다 제적되면서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군대를 갔다 와서 1970년 복학을 하는데 이후 1971년 위수령, 1972년 유신쿠테타 등 박정희 군사정권이 장기집권체제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그는 항상 배후에서 학내시위를 지도했다. 그러나 심재권, 장기표, 조영래, 이신범 등이 체포되어 언론에 오르내릴 때 그만은 늘 잡히지 않고 지명수배된 상태로 남았다. 체포된 동료들의 법정에서는 항상 '공소외 김근태'로 불렸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공소외'였다.
그는 유신쿠테타가 있은 1972년부터는 학생운동만으로 독재정권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중앙정보부의 추적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냉동학원 강사, 보일러 기사 등으로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부인 인재근을 만나 동거하다가 애기도 낳고 살았다. 그러다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수배가 풀려 1980년 4월 26일 뒤늦은 결혼식을 올린다. 1980년 5.17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실무간사로 노동조합 교육과 노동자 의식화 사업에 주력했다. 그리고 공개청년운동이 한참 논의되던 1983년 초에는 구월동에서 역곡으로 이사해서 살고 있었다.